• 2016-06-07 03:3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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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화의 사회적 차원 – 특히 가난한 이들을 향하여" 「복음의 기쁨」을 안고 세상으로(14)

교회의 첫 선포는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 들이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그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라는 것인데, 이는 복음화가 하느님 나라를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 현존하게 하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라는 형제애의 가르침 안에는 이미 복음의 사회적 차원이 깊이 담겨 있습니다. 불의한 사회 구조 안에서 참다운 형제애는 실현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개별 인간뿐만 아니라 사람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도 구원하십니다.”


복음의 가르침은 단순히 하느님과 나와의 개인적인 관계에 그치지 않으며 하느님 사랑에 대한 응답을 선한 행위의 목록으로 제시하지도 않습니다. 복음이 우리에게 제안하는 것은 하느님의 자녀들이 함께 누리는 ‘하느님 나라’입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과 함께 이미 하느님의 나라는 지상에 현존하며 자라고 있습니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17,21; 마태 12,28) 종교가 사적이고 내밀한 영역에 국한되어야 한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녀들을 영원한 행복으로 부르시면서 그들이 이 세상에서도 행복하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회개는 특히 “사회질서와 공동선 추구와 관련된” 모든 것에 대한 재검토를 요구합니다. 지구는 우리 공동의 집이며 우리는 모두 형제자매입니다. 사람 사이의 올바른 관계를 세우는 정의가 모든 정치의 목적이며 고유한 판단기준이라면, 교회 역시 그 정의를 위한 투쟁에서 비켜서 있을 수 없으며 그래서도 안 됩니다.

 

친히 “가난하게 되신”(2코린 8,9) 하느님의 마음속에 가난한 이들을 위한 특별한 자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그리스도인은 가난한 이들이 사회에 온전히 통합될 수 있도록 가난한 이들의 해방과 진보를 위한 하느님의 도구가 되라는 부르심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가난한 이의 울부짖음을 들으신다는 성경의 수많은 말씀들은 만일 우리가 그 호소에 귀를 막는다면 그것은 우리의 죄가 되고, 그들과의 연대성의 결여는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에 직접 영향을 미친다고 가르칩니다. 가난한 이를 돌보고 도우라는 하느님의 명령은 어쩌다가 베푸는 자선행위 차원이 아니라, 빈곤의 구조적 원인을 직시하고 가난한 이들의 온전한 발전을 촉진하도록 일하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시장의 눈먼 힘과 보이지 않는 손을 신뢰할 수 없습니다. 정의의 증진은 경제성장을 전제로 하면서도 더 나은 소득분배와 일자리 창출도 넘어서 가난한 이들의 온전한 진보를 분명히 지향하는 결정, 계획, 구조, 과정을 요구합니다. 교황님은 말씀하십니다. “자신의 생활 방식에 따라 관심을 더 쏟아야 하는 다른 일들이 많아서 가난한 이들을 가까이할 수 없다고 어느 누구도 말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이 가난한 이들의 범주에 경제적 이윤과 무분별한 착취에 황폐해지는 자연환경도 포함되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