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6-07-08 02:5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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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마누엘 하느님

임마누엘 하느님

 

주님께서 몸소 여러분에게 표징을 주실 것입니다. 보십시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이사 7,13-14)

 

이사야 예언자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할 이 때, 유다의 임금 아하즈는 중대한 기로에 서 있었습니다. 아시리아는 티글랏필에세르 3세가 즉위하면서 주변 국가들에 대한 강력한 정복 전쟁을 펼쳐나갔습니다. 이에 저항하는 다마스커스와 사마리아와 띠로 등의 동맹세력은 아하즈에게 함께 할 것을 제안하였습니다. 아하즈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 강대국 아시리아와 저항 동맹세력 사이에서 어느 한 쪽을 선택해야 하는지 갈림길에 서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이사야 예언 말씀의 배경입니다.

야훼께서 예언자를 통해 아하즈에게 표징을 청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표징을 청하라는 이 말씀은 야훼 하느님께서 유다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시려는 것입니다. 오래 전 판관 기드온은 이스라엘을 미디안족의 손에서 구하라는 명령과 함께‘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겠다.’는 야훼의 말씀에 표징을 청하여 받았고(판관 6,14-24), 아하즈 다음 임금인 히즈키야도 자신의 병이 낫고 다시 성전에 오를 수 있다는 표징을 받습니다.(2열왕 20,8-11) 이러한 표징들은 이스라엘의 역사에 자주 등장하며, 눈에 보이는 힘에 의지하거나 그에 굴복하지 않고 오직 이집트 탈출의 엄청난 기적을 행하신 이스라엘의 하느님 야훼를 신뢰하여 위기를 극복하도록 이끄는 도구가 됩니다.

그러나 아하즈는 표징을 청하지 않는데, 그의 말이 흥미롭습니다. “저는 청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야훼를 시험하지 않으렵니다.” 하느님을 시험하지 않겠다는 아하즈의 말이 그럴 듯 해 보이지만, 그는 주님께서 친히 청하라고 하시는데 이를 거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은 그가 청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 결국 그는 자신이 이미 생각하고 있는 길을 가기 위해서 하느님의 뜻을 외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예언자는 아하즈 임금을 꾸짖으며‘주님께서 몸소 여러분에게 표징을 주실 것입니다. 보십시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라고 선언합니다.

그리스도 교회는 처음부터 이 예언 말씀이 하느님의 아들의 탄생에서 이루어졌다고 믿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의‘임마누엘’이 곧 예수님이라고 믿어온 것입니다.(마태 1,22) 그래서 이 예언에 나오는 ‘젊은 여인’은 곧 처녀 마리아로 받아들였습니다. 구약성경 희랍어 번역본인 ⌜70인역⌟과 라틴어 번역인 불가타 성경에서도‘처녀’로 번역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사야 예언서의 ‘젊은 여인’은 본래 히브리어 본문에‘알마’라고 되어 있는데, 이 단어는 처녀만이 아니라 이미 결혼한 젊은 여인도 의미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단어를 마리아가 아닌 다른 인물로 해석하려는 시도들이 있었는데, 대표적으로 이 예언의 임마누엘을 아하즈의 아들 히즈키야 임금으로 보려는 견해입니다. 사실 히즈키야 임금은 아하즈와는 달리 하느님 뜻에 충실한 사람이었고 한 때 이스라엘을 아시리아로부터 안전하게 지키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마리아의 동정성을 의심하는 이들은 히브리어 본문의‘알마(젊은 여인)’라는 이 단어를 근거로 삼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계시와 예언은 구원의 역사에서 그 말씀이 이루어지면서 그 의미도 분명해집니다. 계시와 예언의 언어는 그대로 보존되지만, 그 의미는 자라납니다. 마치 볼품없는 작은 씨앗이 자라나 꽃이 되고 나무가 되어 사람들의 눈에 아름다운 완성품으로 들어오는 것과도 같습니다.

‘임마누엘’ 곧 한 아이가 하느님의 이름으로 우리 가운데 있을 것이라는 이 엄청난 계시의 예언은 분명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에게서 완성됩니다. 그리고 처음‘젊은 여인’으로 주어진 이 언어는 구원의 역사 안에서‘처녀’로 완성됩니다. 이렇게 창세기에서 악마에 대적하여 인간 구원에 일정한 역할을 하리라고 예고된 여인은 이제 우리 가운데 하느님을 낳아줄 젊은 여인으로 한걸음 더 나아갑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표징을 청하라는 말씀에도 아하즈 임금은 자신의 계획에 집착하여 하느님의 뜻을 묻지 않았습니다. 영성생활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더 이상 하느님의 뜻을 묻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대적하던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은 당대 어느 누구보다도 하느님의 법을 열심히 연구하고 경건하게 실천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문제는 ‘지금 여기에서’ 활동하시는 하느님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것입니다. 하느님에 대해 많이 알기에 누구보다도 하느님의 뜻을 잘 물을 수도 있는 사람들이었지만, 하느님을 자신에게 익숙해진 것만큼으로 축소시켜버려 그들에게 하느님은 더 이상 새로움이 되실 수 없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웃과 주변의 상황들을 통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마리아 성모님께서 하느님의 말씀에 얼마나 잘 열려 있는 분이셨는지 보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