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8-12-16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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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말씀

구원의 말씀

 

태초에 생명을 창조하신 하느님께서는 그 생명들을 당신 안에서 완성하시는 역사를 이끌어 가십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특별히 두 가지 특성을 부여하셨습니다. 먼저 창세 1,26-28은 하느님께서 인간을 하느님 닮은 모습으로 창조하시어, 하느님을 대리하여 세상의 모든 생명을 잘 다스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창세 2,7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생명의 숨을 불어 넣으셨다고 선포합니다. 곧 인간의 생명은, 하느님의 생명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의 역사는 하느님을 닮은 인간이 이 세상에서 하느님을 닮은 착한 목자의 모습으로 살아가도록, 그리고 하느님의 생명을 영원히 누리도록 이끌어주시는 역사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중요한 역사를 이루실 때 이를 미리 말씀으로 보여주십니다. 아브라함에게 하신 ‘땅과 자손의 약속’(창세 12,1-3)을 이집트 탈출과 광야 여정 그리고 가나안 정복으로 이루어주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세월이 흐르며 하느님께서 주신 가나안 땅에서 우상을 섬기며 불의한 삶에 깊이 빠져들었고, 이에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들을 통해 유배를 예고하셨고 결국 그대로 이루어져 이스라엘 백성은 약 50년 간 남의 나라 땅에서 비참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백성의 역사는 이렇게 끝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유배에서 고국으로 돌아올 약속을 다시 해 주셨는데 이 약속은 이스라엘이 유배를 떠나기 전 예언자들의 말씀 속에도 있었습니다. 유배 중에도 하느님의 말씀 안에 충실히 남은 자들은 조국 땅으로 돌아오리라는 약속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약속의 말씀도 이루어졌습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말씀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졌습니다.

이 긴 역사를 통해 이스라엘이 깨달은 것은 인간의 구원이 결코 인간의 손에 달려있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돌아보면 자신들이 가진 것 없이 유랑하며 힘겹게 산다고 느끼던 때가 오히려 하느님의 은총 안에 살던 시기였고, 가진 힘을 자랑하며 의기양양 국가를 운영하던 때 사실은 가장 하느님께 등을 돌리고 살다가 결국 유배의 벌로 이어진 시기였다는 것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유배에서 돌아온 이스라엘은 왕국을 재건하지 않고 말씀 중심의 사회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오래 전 하느님께서 주신 말씀 속에 담겨져 있는 메시아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키워갔습니다. 예언서들의 후반부는 유배에서의 귀환을 약속하시는 말씀과 함께 하느님께서 보내주실 메시아에 대한 갈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안에 메시아에 대한 희망이 가득 퍼져 있을 때 세례자 요한이 나타나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언했고, 예수님께서도 같은 말씀으로 공생활을 시작하셨습니다.(마태 3,2; 4,17) 세상을 창조하시고 구원의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하느님의 말씀이 이제 사람이 되시어 이 세상에 우리와 똑같은 인간으로 오셨습니다. 그분이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메시아이십니다. 그분은 태초부터 하느님과 함께 계신 말씀이시고 하느님의 뜻을 이루시려 파견되신 아드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처지에 사시면서 하느님 아버지와의 깊은 친교를 이루시며 우리도 어떻게 하면 하느님을 잘 섬길 수 있는지를 보여주셨고, 죽으시고 부활하시며 우리가 어떻게 부활의 생명을 얻을 수 있는지를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한 14,6)이십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이들을 가까이 하시며 모든 이들이 부족함이 없이 살기를 원하셨고, 세리와 창녀를 맞아들이시며 어느 누구도 차별 없는 한 형제임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사이에 이 일을 이루어가는 것이 구원에 이르는 길임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주님의 기도’는 첫 마디에서부터 우리 모두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라는 것이고, 마태오복음 25장 ‘최후의 심판’은 고통과 궁핍 중에 있는 형제들을 돌보는 것이 곧 구원에 이르는 길임을 보여줍니다. 주님의 기도와 최후의 심판은 아주 다른 소재이지만 큰 공통점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 하느님 안에서 한 형제이며 그래서 다른 형제의 고통을 진심으로 돌보는 것이 하느님 나라의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의 모든 가르침이 이러한 빛으로 일관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이들의 어려움을 돌보아 주었다고 해서 그 공로로 구원에 이르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어떤 선한 일을 하기 전에 이미 주님께서는 우리 구원을 위한 값을 지불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흘러나오는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하는 사람은 형제를 사랑할 수밖에 없고, 또 형제를 사랑하면서 십자가의 예수님을 더 잘 알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잘 알게 되는 것이 구원에 이르는 길입니다. 우리의 선한 행위는 주님 사랑에 대한 자연스러운 응답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필요한 것을 다 이루셨습니다. 그분은 태초에 세상을 창조하신 말씀이시기에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다시 창조하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평화의 인사말을 건네시고,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실 때(요한 20,21-22) ‘숨을 불어 넣었다’는 동사는 태초에 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진흙으로 사람을 빚고 그 코에 숨을 불어 넣었다는 것(창세 2,7)과 같은 단어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믿고 성령을 받아들이는 사람을 부활의 새 생명으로 재창조하신다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태초에 당신의 모습대로 당신의 숨(생명)을 불어넣어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사람이 죄를 지어 죽음이 들어오자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불러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셨고, 말씀이시며 아들이신 예수님 안에서 성령으로 우리를 재창조하셨습니다. 이것이 구원의 역사입니다. “나 야훼는 말하고 그대로 실천한다.”(에제 17,24)

 

구원은 하느님에게서 오고, 믿는 이들은 자신들의 삶을 통해 세상에 구원의 표지가 되는 소명을 받은 것입니다. 사람들이 우리와 사귀면서 우리에게서 삶의 위로를 느끼고 희망을 발견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