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9차 전례 위원회(고해 성사)
 최견우 (사도 요한)  2008/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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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9일 교구청 회의실에서 열린 제 19차 교구 전례 위원회에서 다루었던 고해 성사에 관한 자료입니다.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고 해 성 사]

사람들은 세례성사로 죄의 용서를 받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새 생명을 부여받는다. 그러나 자유를 가진 사람은 자유를 남용할 수 있는 유혹 속에서 살아가기에 죄로 기우는 경향을 언제나 누구나 가지고 있다. 이것은 세례가 불완전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세례로 받은 새 생명이 인성의 불안정성과 나약함을 완전히 제거시킨 것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고해성사는 죄에 떨어져 세례로 받은 은총을 잃고 교회와의 일치가 손상된 사람들에게 회개하고 구원의 은총을 다시 회복할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과 희망을 제공한다. 그러므로 고해성사는 신자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성사이고, 유익한 성사라 하겠다.
죄를 범하는 사람은 그 자신의 마음과 육체가 상처받음은 물론이고 주위 사람들에게도 악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것은 하느님의 목적과 의도에서 빗나간 삶이며 하느님의 사랑을 거절하는 행위이다. 그러나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하느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의 화해를 위해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 고해성사를 세워 주셨다. 따라서 이 성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언제나 구원의 희망을 주는 성사이다.
고해성사는 하느님께 죄를 지은 모든 신자들에게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용서를 베풀어주는 성사이며, 동시에 범죄로 상처를 입혔던 교회와 화해를 이루어 주는 치유의 성사이다. 이 고해성사는 보는 관점에 따라 회개의 성사, 속죄의 성사, 고백성사, 용서의 성사, 화해의 성사라는 여러 가지 명칭으로 불리어 진다.

1. 어원

일반인들이 “고해”라고 부르는 말을 신학에서는 “고해성사”라고 표현한다. “고해”라는 말 속에는 고해성사의 본질적인 한 부분인 참회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물론 죄에 대한 참회로서의 고해는 그리스도교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죄를 지음으로써 신과의 관계를 훼손한 사람들이 참회를 통해 그 관계를 정상화하는 것은 거의 모든 종교에서 통례적이다. 많은 종교에서 공개적인 고해 예식이 행해졌다. 누군가가 죄를 지음으로써 공동체의 질서가 교란되었을 때, 죄 지은 이의 공개적인 고해를 통해 질서를 회복했던 것이다.
불교에서는 이미 2세기부터 구도의 길을 정화상태로 유지하기 위한 승려들의 고해 예식이 행해지고 있었다. 신약성서에서도 하느님 앞에서 죄를 참회하는 모습이라든가(요한 1,9), 공동체 성원들이 공개적으로 자신의 죄를 참회하는 모습이 나타나 있다. 야고보의 편지에 그려진 참회 예식은 아직, 사제 앞에서 행해지는 오늘날 고해성사의 모습을 띠고 있지는 않다. 공동체 성원들이 서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그 고백은 죄를 참회한 자를 위한 공동체의 기도로 이어졌다.
성서, 특히 신약성서는 “속죄”보다는, 그리스어 “메타노이아”(metanoia)에 해당하는 “회개”에 더 주목하고 있다. 구약성서에는, 금식과 통곡으로 자신의 죄를 뉘우치는 사람들을 보신 하느님이 다시 그들을 변함없이 사랑하실 것을 약속한 “속죄의 날”이 기술되어 있다. 그러나 예언자들은 이 공개 속죄 예식이 단지 형식에 그침을 질타한다. 그들은 마음으로부터의 회개를 가르친다. 진정한 회개는 영혼의 깊은 곳에서 비롯됨을 일깨운다. 구약성서의 이와 같은 맥락을 바탕으로 세례자 요한은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심판 때 구원받기를 원한다면 진심으로 회개하라고 촉구한다.
세례자 요한처럼 예수님 또한 회개를 촉구한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과는 달리 그분은 하느님의 심판이 아니라, 임박한 하느님 나라를 말씀하신다. 마르코 복음에서 예수님의 첫 말씀은 “때가 차서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습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시오”(마르 1,15)라고 하신다. “메타노이아”는 “생각을 바꾸다”, “달리 생각하다”, “이면을 살펴보다” 등의 어원적 의미를 지니는데, 개선과 전환은 새로운 생각에서 시작된다. 생각을 바꾸어야 자신의 모습을 바꿀 수 있다. 특히 루카 복음은 이 “메타노이아”의 개념을 즐겨 사용한다.
세례를 받은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으로 채워진다. 성령의 힘으로 사람들을 치유하셨던 예수님처럼 진정한 삶을 향한 새로운 길을 갈 수 있게 된다. 회개는 단지 유다인만을 위한 하느님의 은총이 아니다. 이교도라고 해서 스스로를 이 은총의 대상에서 제외해서는 안 된다. 이 은총을 누리기 위해 그들이 해야 할 일은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무지”(사도 3,17)에서 몸을 돌려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는 것이다.
“화해”를 의미하는 라틴어 “레콘칠리아시오”(reconciliatio)는 “다시 하나 됨”이라는 어원적 의미를 가진다. 또한 “레콘칠리아시오”는 인간과 신의 관계를 포함하는 개념이기도 하다. 죄를 지음으로써 인간은 신과의 정상적인 관계를 잃어버리게 된다. 성서에 따르면 신과 인간 사이의 공동체의식의 회복, 다시 말해 신과 인간의 화해는 언제나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조건 없는 제안이다. 하느님과 화해하기 위해 꼭 어떤 속죄 행위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하느님의 제안을 감사히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 바오로는 이런 점에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전했던 말씀에서 강조하고 있다.
“속죄”라는 의미의 라틴어 “페니텐시아”(poenitentia)는 “처벌”의 의미를 지닌 “페나”(poena)에서 유래했다. “속죄”라는 말은 “죄의 탕감”과 관계있다. 죄 지은 자는 처벌받아야 하며, 그 처벌을 통해 죄를 탕감해야 한다는 뜻이다. 로마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자기 죄의 탕감 문제가 복음이 전하는 화해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죄는 어떤 속죄 행위를 함으로써, 즉 처벌을 받음으로써 탕감되는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다. 속죄란 감옥살이로 죄를 탕감하는 것과 유사하며, 그 탕감 행위를 통해 비로소 처벌에서 자유로워진다고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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