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번호 : 362
  • 글쓴이 : 지요하
  • 작성일 : 2005/04/11
  • 조회수 : 1,817

은퇴하신 경 요셉 주교님에 대한 추억들 ①

은퇴하신 경 요셉 주교님에 대한 추억들 ① 지난 6일 오후 2시 대전시 충무체육관에서는 천주교 대전교구 제4대 교구장 유흥식 라자로 주교님의 착좌식이 있었다. 이 착좌미사에서는 제3대 교구장 경갑룡 요셉 주교님의 이임식도 함께 있었다. 나는 그 행사에 참석하지 못했지만 그 행사가 진행되는 시간에 집에서 하던 일을 멈추고 75세 정년으로 교구장 직무에서 떠나시는 경 주교님에 대한 추억을 잠시 떠올려 볼 수 있었다. 그 추억들을 오늘 기록하기에 앞서 유흥식 라자로 주교님의 교구장 취임사에 나와 있는 경 주교님에 관한 말씀을 소개해 본다. 『존경하옵는 경 주교님, 1년 9개월 전에 이곳에서 거행된 저의 주교 서품식에서 "더 이상 인계할 것이 없도록 유 주교에게 맡길 것이고, 나의 생각이 유 주교의 생각이고 유 주교의 생각이 바로 내 생각"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주교님께서는 실제로 그렇게 하셨습니다. 제겐 아름답고 멋진 영원한 큰 형님이십니다. 경 주교님께서는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이 우리나라를 방문하셔서 한국천주교회 200주년을 경축해 주시고 장한 순교복자 103위를 성인 품에 올리신 1984년에 대전교구장으로 오셨습니다. 20년 9개월 동안 신자와 본당 증가, 대전가톨릭대학 설립, 성지 개발 등 하느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하여 온 정열과 힘을 다 바치셨습니다.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대전 교구민 전체의 이름으로 주교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늘 지금과 같으신 모습으로 부족한 저와 대전교구를 위하여 어른으로 남아 주시리라 믿습니다.』 이 대목에서 나는 깊은 감동을 맛보았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경 주교님의 모습들이 한꺼번에 내 망막 앞에 가득해지는 느낌이었다. ★경 주교님과의 최초의 만남 내가 경 주교님을 처음 뵌 때는 1985년 10월이다. 10월 마지막 주일에 주교님은 태안에 오셨고 안면도 누동공소를 찾으셨다. 정해진 계획에 의한 사목방문이나 견진성사 때문에 오신 것이 아니었다. 교구장 주교님이 대전에서 가장 먼 곳인 태안에, 또 안면도에서도 끄트머리인 누동공소를 찾으신 것은 매우 특별한 까닭이 있었다. 당시 안면읍 누동리는 <현대건설>의 '천수만간척공사'에 의해 대다수 주민들의 생업의 터전이었던 해태 양식장을 잃는 어려운 지경에 빠져 있었다. 따라서 천주교 누동공소도 침체 국면을 맞게 되었다. 대부분의 신자들이 큰 경제적 곤란 속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전해 들으신 주교님은 누동공소 신자들을 위로하시기 위해 몸소 안면도 누동공소를 찾으신 것이었다. 주교님도 누동공소 신자들을 위해서 실질적인 일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단지 누동공소 신자들의 어려움을 직접 눈으로 파악하고 몸으로 느끼며 위로를 해주고 미사를 지내 주시는 일 뿐이었다. 그 위로의 말씀과 누동공소 신자들을 위한 미사 봉헌을 위해 대전에서 안면도 누동리까지 먼 걸음을 하신 것이었다. 그때 주교님은 운전기사만을 데리고 혼자 오셨다. 일단 태안 성당으로 오신 주교님을 안면도 누동공소로 안내해 드리는 일을 내가 맡게 되었다. 나는 주교님 승용차의 앞좌석에 타고 가면서 태안에 대해, 안면도에 대해, 또 누동공소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여러 가지 사항들을 말씀 드렸다. 누동공소 신자들과 만나 일일이 악수를 하고, 위로의 말씀을 해주시고, 신자들과 점심 식사를 함께 하신 후 누동공소 신자들을 위한 미사를 집전하시는 주교님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큰 감동을 받았다. 교구장 주교님께서 생활 환경의 변화로 어려움에 빠진 신자들을 위로하시기 위해 새벽에 나서서 안면도 누동공소까지 오시어 미사를 지내신다는 그 사실을 내 눈으로 목격한다는 것이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 평생토록 잊지 못하리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 후 나는 경향신문사에서 발간하는 <정경문화>(후에 <월간경향>으로 이름이 바뀜)의 청탁으로 「현대, 서산 땅 정복하다」라는 이름의 르포를 쓰게 되었다. <현대건설>의 천수만 간척공사가 안고 있는 갖가지 문제점들과 어장을 잃게 된 어민들과의 보상 문제 등을 광범위하게 다룬 원고지 100매가 훨씬 넘는 긴 글이었다. <정경문화> 1986년 신년호에 발표되고 큰 활자의 제목이 표지를 장식하기도 한 그 글의 누동공소 관련 대목을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필자는 누동리의 천주교회 공소(公所)를 찾았다. 그곳에서 사람들을 더 만나 보고 아래 고남리로 내려갔다가 위로 거슬러 오르면서 대야도와 정당리, 창기리의 어촌들을 둘러볼 생각이었다. "지지난해까지만 해도 우리 누동 공소는 태안 본당의 자립 운영에 큰 도움을 줄 만큼 모든 게 대단한 공소였지요. 많은 교무금 배당에도 불평하지 않고 해태 수확기에는 거의 모두 완납을 하곤 했었지요. 그러나 해태 양식이 절단나버린 지난해부터는 교무금을 내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본당으로부터 재정 도움을 받아야 하는 형편이 되었습니다. 작년 크리스마스 때는 본당에서 모은 불우이웃 돕기 성금을 고스란히 구호금이란 명목으로 받았고, 올해부터는 본당 교무금 배정에서도 아예 제외되었습니다." 공소회장 김영범(39)씨는 이렇게 말하며 쓴웃음을 짓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 공소는 발전 가능성이 많은 공소였습니다. 80년 전에 신앙의 씨가 뿌려졌고 공소로 존속해 온 자랑스러운 역사에서 긍지를 느끼며 신앙의 활성화를 이루어서 모든 것이 활발하였지요. 지난 82년에는 교구와 외부의 도움을 다소 받았지만 우리 공소 신자들이 열과 성을 모아서 이렇게 교회 건물까지 새로 지었고요. 지금 같으면 어림없는, 꿈만 같은 일입니다. 하여튼 우리 공소는 갑자기 힘을 잃고 침체되고 말았습니다. 신자가 늘어나기는커녕 있던 신자들도 점점 줄어들고… 발전 가능성이 전혀 없게 되었습니다." 전에 공소회장을 했었다는 육만구(52)씨도 이렇게 말하며 우울한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 신자들은 오죽하면 주교님께서 먼길을 오셔서 우리를 위로해 주고 가셨겠느냐고 한다. 지난 10월 말 주일을 택해 대전교구장 경갑룡 주교가 와서 누동 공소 신자들에게 강론으로 위로의 말을 해 주고 신자들과 더불어 미사를 드리고 갔다는 것…. 그렇게 말하는 신자 주민들의 표정에는 그래도 희망의 빛을 잃지 않으려는 가냘픈 의지 같은 것이 안쓰럽게 어려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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