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번호 : 365
  • 글쓴이 : 지요하
  • 작성일 : 2005/04/12
  • 조회수 : 1,932

은퇴하신 경 요셉 주교님에 대한 추억들 ②

은퇴하신 경 요셉 주교님에 대한 추억들 ② ★내 작품들을 읽어 주신 경 주교님 1985년 10월 말 주일의 안면도 동행을 계기로 경 주교님은 태안 본당의 '지요하'라는 삼십대 젊은 신자의 이름을 잘 기억하실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1986년 봄 나의 두 번째 출간 장편소설 「인간의 늪」을 한 권 사인하여 주교님께 우송해 드림으로써 나를 좀더 확실히 아실 수 있게 되었다. 그 후 나는 1992년에는 세 번째 출간 장편소설 「회색정글」을, 2002년에는 다섯 번째 출간 장편소설 「죄와 사랑」을 주교님께 보내 드렸다. 2000년의 네 번째 출간 장편소설 「검은 미로의 하얀 날개」는 3권이나 되는 작품이어서 주교님께 너무 부담을 안겨 드릴 것도 같아 보내 드리지 않았다. 그런데 주교님께서는 내가 책을 보내 드릴 때마다 고맙다는 말씀과 함께 꼭 읽어보겠다는 말씀을 주시거나 한참 후 책을 다 읽으시고 나서 소감을 보내 주시기도 했다. 주교님의 친필이 적힌 카드나 서신을 받을 때마다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아내와 어머니도 감격을 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나는 지금도 주교님의 그 친필 카드와 서신을 책장 안에 펴놓은 채 잘 모셔 놓고 있다. 가장 최근인 지난 2002년의 「죄와 사랑」을 받으시고 나서 한참 후인 그 해 11월 1일 주교님께서 내게 보내 주신 서신의 내용을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친애하는 지요하 형제에게. 형제가 지난 부활 때 보내 준 장편소설 '죄와 사랑'을 이제야 다 읽었습니다. 아주 재미나게, 그리고 감동 깊게 읽었습니다. 끊임없이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형제에게 경의와 격려를 보냅니다. 주 성모님의 사랑으로 내내 영육간 건강하시고 건투하심을 빕니다.》 1994년 대전교구에는 <대전가톨릭문우회>라는 이름의 단체가 탄생했다. 대전교구 신자 문인들이 거의 모두 참여하여 만들어진 단체였다. 이 문우회를 만든 이는 10년 후에 주교가 되시는 유흥식 라자로 당시 교구청 사목국장 신부님이었다. 그리고 유흥식 신부님이 문우회를 만들게 된 동기는 경 주교님의 특별 지시 때문이었다. 교구장 주교님이 당시 사목국장 유흥식 신부님께 특별히 지시하여 문우회를 만들게 된 동기 속에는 내 단편소설 한 편이 촉매제 구실을 했으리라고 나는 짐작한다. 나는 1993년 가을 <여성문학> 창간호의 '초대석'에 「고백」이라는 단편소설을 발표했다. 우리의 삶 안에 깊이 침투해 있는 '낙태' 문제를 다룬 작품이었다. 1996년에는 <내일을 여는 작가>에 재 발표되고, 2003년에는 <대전주보>에도 연재된 「고백」을 처음 발표했던 <여성문학> 창간호를 나는 주교님께도 한 권 보내 드렸다. 주교님께서는 내 소설 「고백」을 읽으신 것 같았다. 내 소설을 읽으신 것이 계기가 되어 교구 문우회 창립의 필요성을 느끼셨던 것으로 나는 짐작한다. 내게 직접 말씀은 하지 않으셨지만, 주교님께서 내 소설을 읽으신 것이 확실한 이유로 나는 내 아내에 대한 주교님의 각별하신 태도를 들 수 있다. 문우회 창간호 출판기념회 때던가, 내 아내를 소개해 드리자 주교님은 매우 반색을 하셨다. 그냥 평범한 반색이 아니었다. 주교님의 그 모습을 보면서 나는 주교님이 내 소설 「고백」에 등장하는 여주인공(실은 내 아내)을 쉽게 떠올리신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쉽사리 할 수 있었다. 그 후로도 주교님은 우리 부부를 보실 때마다 나보다도 더 내 아내를 반가워하시곤 했다. 반가움을 표하시는 말씀도 더 많이 주시고…. ★내 가족들을 기억하고 사랑해 주신 경 주교님 1988년 내 어머니께서 고장의 한 외과의원에서 받은 자궁 적출 수술이 잘못되어 재수술을 받고 무려 3개월 동안 병상 생활을 하신 적이 있다. (그때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내 무능과 실책이 한탄스럽다.) 매일같이 어머니의 병상 곁에서 간병을 해 드릴 때였다. 주교님이 우리 본당에 사목방문을 오셨다. 나는 주교님을 뵙는 자리에 함께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주교님은 내가 보이지 않자 신부님과 사목위원들에게 나를 찾으시고 안부를 물으셨다고 한다. 사정을 들으시고는 내 어머니의 건강 회복을 기원해 주셨고…. 주교님의 그 말씀을 내게 전하면서 당시 사목회장이었던 류병만 프란치스코 형제는 내가 부럽다고 했다. 주교님이 먼 본당의 젊은 신자를 기억하고 계시는 게 흔한 일이겠느냐며…. 설령 기억하신다 하더라도 안부를 물으시는 일이 어디 쉬운 일이냐며…. 류병만 형제의 그 말을 들으면서 나는 주교님의 자상하신 성품을 다시 느끼고 마음속으로 깊이 감사했다. 지금은 내가 나이도 먹고 해서 전례 봉사에서 은퇴(은퇴)를 했지만, 옛날에는 전례 봉사를 참 많이 했다. 70년대초 우리 한국교회 전례에 '미사해설'이라는 역할이 처음 도입되었을 때 내가 우리 본당에서 최초로 미사해설을 했던 것은 물론이다. 그리고 1976년 고향을 떠나 전국 각지 유량 생활을 하다가 80년 귀향을 한 후로는 90년까지 10년 동안 모든 주일미사와 평일미사의 미사해설을 전담했다. 1982년 수녀님들이 우리 본당에 오시기 전까지는 판공 때마다 신부님을 수행해서 미사 복사에다가 제의를 차려 드리는 일까지 했다. 2년마다 한 번씩 우리 본당에 오셔서 견진성사를 주시고 미사를 집전하시는 주교님을 도와 미사해설을 여러 번 했다. 내 미사해설이 주교님 마음에 쏙 드셨던 모양이다. 한 번은 견진성사 미사 후에 사목위원들과 점심 식사를 하시는 자리에서 주교님이 내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 "내가 태안 본당에 올 적마다 우리 지 형제가 미사해설을 잘해 주어서 참 고마워요." 주교님께서 전례봉사자의 수고에까지 개별적으로 치하를 하시다니…. 나는 주교님의 자상하신 성품이 다시 한번 느껴져서 더욱 고마운 마음이었다. 주교님은 우리 본당에 오실 때마다 우리 가족과 만나시는 것을 즐겨 하셨다. 내가 인사를 드릴 때 어머니가 보이지 않으면 꼭꼭 내 어머니의 안부를 물으시곤 했다. 내 어머니와 아내를 보시면 꼭꼭 악수를 해주시고 담소를 나누어주시곤 했다. 내 딸아이가 네 살 때던가, 녀석이 제 친구에게 주교님을 가리키며 "우리 주교님이야, 우리 주교님."이라는 말을 했다. 그 말을 들으신 주교님은 아이가 무척 예쁘게 보이셨던 것 같다. 내 딸아이에게로 오셔서 안아 주시고 손등에 뽀뽀를 해주셨다. 친구 아이의 볼도 어루만져주시고…. 우리 본당에 오신 주교님께 내가 한 번은 아들 낳은 말씀을 드리니, "앞으로 아들과 딸을 하나씩 더 낳아서 네 명의 자녀를 두라고. 그래 갖고 아들 하나는 신부 보내고, 딸 하나 수녀 보내도록 해. 그러면 얼마나 좋겠나"라는 말씀을 하셨다. 주교님의 이 말씀은 내 단편소설 「고백」속에도 소개가 되었다. 재작년에는 우리 본당에 오셨을 때 내 아들녀석을 보시고는 공부 잘하느냐고 물으셨다. 내가 "잘하는 편입니다"라고 말씀드리니, "그럼, 고등학교는 대건고등학교로 보내도록 해"라는 말씀을 하셨다. 대건고등학교는 논산에 있는 천주교 재단에서 운영하는 학교다. 졸업생들을 신학교로 많이 진학시키는, 그래서 성직자를 많이 배출하는 학교로 알려져 있다. 신임 교구장 유흥식 라자로 주교님도 대건교등학교 출신이시라고 한다. 대건고 1학년 때 천주교 신자가 되셨다고 했다. 주교님의 그 말씀을 옆에서 들은 내 아들녀석은 자신이 당연히 대건고등학교로 진학할 것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내 아들녀석은 내년에는 대건고등학생이 되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장차 부모의 뜻대로 사제가 될지도 모르고…. 경갑룡 요셉 주교님이 75세 정년으로 지난 6일 은퇴를 하시게 되니, 나와 관계되는 여러 가지 인연의 모습들이 새록새록 떠올라서 기록을 해보고 싶은 마음을 갖게 되었다. 이것은 스스로 내 삶을 기록하는 것이기도 한데, 혹여 주교님께 누가 되는 것은 아닌지 염려스럽기도 하다. 이제는 편안히 은둔 자적으로 지내시게 되실 주교님의 노년 생활이 주님의 은총 안에서 더욱 아름답고 보람되시기를 바라며 하느님께 기도한다. 주교님의 자상하심과 따뜻하심에 다시 한번 감사 드리며…. * (050411) 충남 태안 샘골에서 지요하 막시모 적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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