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번호 : 73
  • 글쓴이 : 지요하
  • 작성일 : 2005/03/09
  • 조회수 : 2,909

떡시루 물에 발을 데신 내 누님

떡시루 물에 발을 데신 내 누님 <1> 벌써 한 달 전 일이 되었지만 지난 설은 내 누님과 누님 가족 모두에게 평생 잊지 못할 명절이 될 것 같다. 누님이 설 전날 집에서 떡을 찌다가 끓는 물로 오른쪽 무릎과 왼쪽 발을 데어 병원에 입원까지 하고 고생을 많이 했기 때문이다. 설날 아침 누님과 통화를 할 때는 '약간' 데었다는 말만 들었다. '괜찮다'는 말도 들었고, 곧 경기도 용인에 있는 산소로 성묘를 간다는 말도 들었다. 정말 누님은 끓는 물에 덴 발로 먼길 성묘 행사에도 동참을 한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정말로 괜찮은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설 다음날 병원에 간 누님은 그 길로 입원을 하게 되었다. 입원을 하고 화상 치료를 받으면서 누님은 고통이 몹시 컸던 것 같다. 지난달 22일 우리 부부가 안양의 한 병원으로 문병을 했을 때 누님은 치료받을 때의 극심했던 통증 얘기를 하면서 목이 메었다. 오른쪽 무릎의 화상은 약간의 흉터를 남기고 일찍 아물었는데, 왼발 발가락 부위의 화상은 치료 기간이 꽤 길었다. '깊은 2도' 화상이라고 했다. 3도까지 갔으면 피부 이식을 해야 하는데, '불행 중 다행'이라는 말을 담당 의사에게서 들었다고 했다. 소독을 할 때의 극심한 통증을 호소하니, 그건 신경이 살아 있는 증거라고 의사 선생님이 오히려 좋아하더라는 말을 전하면서도 누님은 눈물을 지었다. 누님 문병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나는 조금은 어처구니없는 심정이었다. 왜 집에서 떡을 찌다가 그런 사고를 당했는지, 꼭 집에서 떡을 쪄야만 했는지 의아한 마음이었다. 지금 세상에도 방앗간이 아닌 자기 집에서 떡을 찌는 사람이 다 있다니…! 속으로 쯔쯔 혀를 차기도 했다. 설날 아침 전화 통화로 사고 소식을 들었을 때 대뜸 어머니가 하셨던 말도 내 뇌리에서 되살아났다. "요즘 떡방아간에서 떡 찌는 삯이 워낙 비싸서 한 푼이라도 애낄라구 그런 거 아녀? 어떻게든지 한 푼이라도 애끼구 여축해서 이 친정 에미헌티 용돈 보내주느라구…. 그것두 내 탓이 아닌지 물르겄네." "에이, 어머니두 참…. 아무려면 누님이 떡방아간 삯을 애낄라구 그랬을라구요." "하긴 뭐, 그 집이서는 그전부터 보니께 떡을 참 별나게 찌더라구…. 알밤이랑 대추랑 잣이랑 콩도 많이 넣구…. 그 집 식구들이 그런 떡을 좋아헌디야. 아마 또 그렇게 별난 떡을 찌느라구 집에서 그 공사를 혔을 겨." "그렇게 생각허세요. 어머니 맘 아프신 거야 당연헌 거지먼, 거기에다가 누님이 보내 주시는 어머니 용돈을 결부시켜서 너무 미안해 허시지는 말구요." "그래두 맘 한구석이 절리는 걸 어뜩혀…." 어머니의 그 말을 다시금 떠올리니 나도 마음 한구석이 결리는 기분이었다. 친정 생각을 너무 하고 사시는 누님의 모습을 자꾸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고마움을 지나 절로 미안해지는 마음이었다. <2> 누님이 집에서 떡을 찌다가 끓는 물에 발을 덴 것은 물론 실수 탓이지만, 오늘날의 떡 시루는 옛날의 떡 시루가 아닌 탓이었다. 요즘은 특수 쇠붙이로 만든 가벼운 떡 시루로 떡을 찌는데, 그 떡 시루를 올려놓는 솥도 옛날 부뚜막의 무쇠 솥이 아닌 탓이었다. 부뚜막의 무쇠 솥이 아니고, 주방 가스 렌지 위에 올려놓는 가벼운 솥이니 사고 위험이 클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가스 렌지 위의 가벼운 솥에서 떡 시루를 떼어 낼 때 단박 분리가 되지 않고, 가벼운 솥이 떡 시루에 달려 올라온 연유로 사고가 난 것임은 설명을 듣지 않고도 쉽게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옛날 부뚜막의 무쇠 솥에다가 떡 시루를 올려놓고 떡을 찌는 경우라면 끓는 물에 발을 데는 사고는 날래야 날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절로 옛날 풍경이 아련히 떠올랐다. 옛날에 살았던 남문리 옴팡집의 부엌 풍경이…. 내 어렸을 적에 어머니는 생계 수단으로 밀주를 빚어 파느라고 종종 밤에 몰래 부엌문을 닫고 지에밥을 찌곤 했다. 한밤중에 먹는 따끈따끈하고 야들야들하고 꼬슬꼬슬하고 쫄깃쫄깃한 지에밥이 얼마나 맛이 좋았던지…. 멍석에다 지에밥을 살살 펴고 누룩을 버무린 다음 양푼에다 담아 물을 붓고 힘껏 치댄 다음 독 안에 밑술을 앉히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은 또 얼마나 재미있었는지…. 결국 세무서꾼들한테 밀주가 적발되어 어머니가 눈물을 흘리며 독 안의 익어 가는 밑술을 죄 퍼다 버린 이후로 어머니는 다시는 지에 밥을 찌지 않았다. 어머니가 눈물을 흘리며 바가지로 독 안의 냄새도 좋은 밑술을 모두 퍼다가 집 앞 행길가 도랑에다 버리던 날의 그 정경은 내 80년대 발표 졸작 중편소설 <소반(小盤) 위에 청산(靑山)을 빚다> 안에 자세히 묘사되어 있지만, 나는 지금도 지에밥을 생각하면 꿀꺽 침이 넘어간다. 내게는 지에밥이 떡보다 더 맛있었다고 생각한다. 떡은 일년에 단 두 번을 쪘다. 추석 명절과 설 명절 때였다. 추석에는 송편을 빚었고, 설에는 주로 팥고물 시루떡을 쪘다. 특히 설 전날 밤에 시루떡을 찌던 풍경이 아련하고도 그립다. 시루떡을 찌는 일은 설음식 준비의 가장 중요한 일이고 또 맨 마지막 행사였다. 언제나 밤에 하기 마련이었다. 아버지는 낮 동안 시루를 잘 닦아서 말리곤 했다. 동그란 구멍이 송송 뚫린 시루 밑바닥에는 댕댕이나무 넝쿨을 베어다가 동그랗게 감아서 깔기도 하고 김발을 깔기도 했다. 지금은 대개들 베보자기를 깔지만…. 그리고 그 위에 팥고물을 깔고, 다음에는 쌀가루를 얹는데, 쌀가루 층의 두께를 놓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의견 충돌을 빚기도 했다. 어머니는 떡을 얇게 쪄야 먹기도 좋고 맛이 좋다고 했고, 아버지는 좀 두껍게 쪄야 먹음직스럽다고 했다. 결국엔 시루 아래로는 쌀가루를 얇게 앉히고 위로는 두껍게 앉히는 식으로 두 내외가 타협을 하는 때도 있었다. 쌀가루를 모두 앉힌 떡 시루를 아버지가 번쩍 들어 부뚜막의 무쇠 솥 위에 중심 잡아 올려놓으면 어머니는 밀변 붙이는 일을 했다. 밀가루를 물에 갠 것을 밀변이라고 했다. 그 밀변을 무쇠 솥과 떡시루가 잇대어져 있는 부분에 마치 허리띠를 두르듯 둘러 붙이는 것이었다. 아궁이에 불을 때는 일은 아버지 몫이었다. 우리 집은 내 초등학생 시절까지는 아버지와 내가 산에서 해 오는 나무로 밥을 지어먹고 군불을 때곤 했다(요즘 초등학생 아이들이 산에서 땔나무를 해 온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다). 그리고 내 중학생 무렵부터는 왕겨를 때고 살았다. 아버지가 곡물업을 하셨는데, 촌에서 벼를 사다가 정미소에서 도정을 하면 왕겨가 남게 마련이었다. 그 왕겨를 가마니에 담아 지게로 지거나 리어카로 실어 나르는 일은 내 몫이었다. 왕겨를 때려면 풍구라는 도구가 필요했다. 아버지는 풍구의 연결 부분을 아궁이 안에 넣고 풍구의 바람이 솟구치도록 작은 구멍들이 숭숭 뚫려 있는 둥그런 쇠붙이 위를 짚으로 덮었다. 그 짚에 성냥으로 불을 붙이고 한 손으로 풍구를 살살 돌리면서 다른 한 손으로는 왕겨를 한 주먹씩 집어 아궁이 안에 던져 넣곤 했다. 지속적으로 풍구를 돌리면서 불을 때니 왕겨도 좋은 땔감이었고 화력이 괜찮은 편이었다. 그러나 왕겻불로 떡을 찌는 시간은 되우 길었다. 아버지는 오래오래 아궁이 앞에 앉아 불을 때었다. 무쇠 솥 안에서 물은 지속적으로 끓었다. 무쇠 솥 끓는 물의 풍성한 김은 떡시루 밑의 구멍 속으로 파고들고 서서히 팥고물과 쌀가루의 층층으로 스며들어 마침내는 온 시루 안을 뜨겁게 달구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시계를 보지 않고도 불을 땐 시간을 정확히 아시는 것 같았다. 또 시루에서 풍겨 나는 냄새로 떡이 제대로 잘 쪄졌는지도 아시는 것 같았다. 이윽고 불 때기를 멈추고는 잠시 후에 시루 뚜껑(왕골로 만든 것을 사용하기도 했고, 솥뚜껑을 사용하기도 했다)을 열고, 풍성한 김을 얼굴로 맞으며 젓가락을 꾹 찔러 보았다. 젓가락이 떡 속으로 들어가는 감촉, 그리고 떡 속에서 뽑혀져 나온 젓가락을 보는 것만으로도 떡이 잘 쪄졌는지를 아시는 것 같았다. 그렇게 떡이 다 익은 것을 확인하고 나면 어머니와 아버지는 마른 채로 단단히 굳어 있는 밀변 떼어 내는 일을 했다. 그리고 아버지가 수건을 양손에 쥐고 떡시루를 번쩍 들어 솥에서 떼어 낸 다음 부엌 바닥에다 내려놓았다. 그러면 어머니는 시루 안의 김을 호호 불며 칼을 떡 시루 안으로 깊숙이 꽂았다. 그리고 열십 자를 그었다. 그러면 이번에는 또 아버지가 시루를 번쩍 들어 멍석 베보자기 위에다 엎었다. 그런 다음 다시 시루를 들면 시루 속에서 쏙 빠져나온 한아름이나 되는 떡이 화들짝 모습을 드러내며 뜨거운 김 속에서 함빡 미소를 짓는 듯했다. 부엌에는 이미 누님과 나, 그리고 조무래기 동생들이 올망졸망 모여 있었다. 떡 주위에 쪼그리고들 앉아 군침을 삼켰다. 어머니는 떡을 썰어서 우선 아이들부터 한 조각씩 안겨 주었다. 떡을 받아 든 아이들은 떡이 뜨거워 손을 바꾸며 호호 불고 냠냠 맛있게 먹고…. 떡 썰기를 마친 어머니는 우선 한 접시 담아 들고 옆집으로 갔다. 우리 바로 옆집 조 영감님이 야심한 시각에도 자지 않고 우리 집의 떡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조금은 얌체 같게 해마다 설 명절에도 떡을 찌지 않고 이웃집들의 떡으로만 설을 쇠는 조 영감님 집이었다. 그것을 잘 아는 고로 어머니는 우선 조 영감님 집으로 떡을 가져가는 것이었다. 그러면 그 집에서는 이런 대화가 흘러나왔다. "설희 엄만가? 나, 설희 엄마 떡 좀 먹구 잘라구 연태 안 자구 있었어." "예, 그러신 줄 알었어유. 어서 잡수세유. 금방 찐 떡이라 아주 맛있을 거예유." <3> 누님은 떡방아간의 삯이 워낙 비싸서(떡 한 말 삯이 1만 5천원이라니…) 그 삯을 아끼려고 집에서 떡을 찐 것은 아닐 터였다. 친정 어머니께 용돈 보내 드릴 돈이 없어서 한 푼이라도 여축하려고 그런 것은 더욱 아닐 터였다. 어쩌면 누님은 옛날의 풍경이 그리웠는지도 모른다. 비록 옛날처럼 재래식 부엌의 부뚜막에서 무쇠 솥 위에 시루를 얹고 불을 때어 찌는 떡은 아닐지라도, 주방의 가스 렌지 위에서 찌는 떡일망정, 그렇게 집에서 손수 떡을 찜으로써 다소나마 옛날의 풍정을 느껴 보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옛날 우리 옴팡집의 어두컴컴한 부엌 안에는 가난한 부부의 정답게 도란거리는 말소리가 있었다. 아궁이 앞에서 풍구 돌아가는 소리가 아늑했다. 떡 시루의 풍성한 김은 아련한 전설이었다. 김이 무럭무럭 나는 떡 조각을 떼어 이놈 저놈에게 나누어주시는 어머니의 손놀림, 오순도순 둘러앉아 제각기 떡 조각을 받아 들고 맛있게 먹는 조무래기들…. 옛날의 그 풍경이 그리워 내 누님은 지금 세상에도 집에서 떡을 쪘는지도 모른다. 그립고도 아련한 옛날 풍경을 떠올리는 상념을 즐기다가 나는 문득 병원에서의 누님 모습을 다시 떠올렸다. 문병을 마치고 병실을 나올 때 나는 누님에게 짐짓 물었다. "내년 설 때도 집에서 떡을 찌실려우?" 그러자 누님은 빙긋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려야지. 내년에도 난 집에서 떡을 찔 겨. 모두 반대를 허겄지먼…." 누님의 그 말을 떠올리면서 나도 그때의 누님처럼 혼자 빙긋이 미소를 지었다. * (050309) 충남 태안읍 샘골에서 지요하 막시모 적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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