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티 성지 진입로 개설 작업
‘삽티(揷峙)’ 혹은 ‘삽고개’라 일컫는 이곳은 우리 천주교회 박해 시대의 애절한 역사를 간직한 산골입니다.
충남 부여군 홍산면 상천리에서 북쪽을 향하여 내산면 금지리로 넘어가는 큰 고개를 옛적부터 ‘삽티’ 또는 ‘삽고개’라 일컬었습니다. 이 고개는 동쪽의 ‘천보산(天寶山)’ 줄기가 북쪽으로 뻗어서 서쪽으로 휘어지는 산마루입니다. 이 산마루 ‘삽티’에서 서쪽으로 휘어진 산줄기가 높이 치솟는 정상을 ‘천덕산(天德山)’이라 합니다. 천덕산에서 다시 서쪽으로 이어지는 능선은 ‘월명산(月明山)’으로 이어지고 월명산의 서쪽 계곡은 현재의 보령호 상류를 이루는 계곡으로 숙어집니다. 그 월명산 정상과 능선의 동서로 부여군과 보령시의 경계를 이룹니다.
부여군에 속하는 천보산과 천덕산 사이에는 남쪽으로 구불구불 3.5㎞ 가량의 계곡이 길게 흘러내려 있습니다. 이 계곡에 자리 잡은 마을을 ‘상천리’라 하는데, 동편 천보산 아래의 마을을 상천1리, 서편 천덕산 아래의 마을을 상천2리, 이렇게 행정적 구분을 합니다. 주민들은 상천1리를 ‘아랫삽티’라 하고, 상천2리를 ‘윗삽티’라 합니다. 윗삽티 마을 앞에는 계곡에서 흘러내린 물을 담고 있는 상천호(上川湖)라는 저수지가 있습니다. 윗삽티 마을의 정경을 물속에 거꾸로 담아 반사하리만큼 청정한 호수입니다. 이 호수를 지나 계곡 길을 따라 북쪽 산마루에 올라서 내산면 금지리로 넘어가는 높은 산마루가 ‘삽티’라는 고개입니다.
이렇게 ‘삽티’ 고개에서 남쪽을 향하여 계곡을 따라 ‘상천호’에 흘러들어가는 물은 ‘상천천(上川川)’이라는 개천을 이루고 그 동서 양편의 여러 작은 계곡들 또한 여러 갈래의 지류를 형성하는 개울이 흐릅니다. 그 서편에서 흘러내려서 상천천에 합류하는 지류 가운데 매우 깊숙한 산속에서부터 발원한 개울을 끼고 또 다른 계곡을 형성한 곳에는 옛적에 천주교 신자들이 옹기를 굽던 ‘즘터’가 있습니다. 그 즘터 위의 비탈진 산자락에서 1964년 5월에 성물이 담겨진 옹기가 발굴되었습니다. 당시의 산주가 일꾼들을 동원하여 산지를 개간하던 중에 허물어진 묘터에서 그 옹기를 발굴하였다고 그 때 일했던 분들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 발굴된 유물들은 서울의 절두산 성지 박물관에 보관 되어있습니다. 그 유물 발굴된 곳에 대하여 교회사 학자들은 황석두 루카 성인의 안장지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삽티!
삽티는 황석두 루카 성인과의 관련으로 매우 중요한 곳입니다. 황석두 성인께서 ‘산막골’에서 선교사 페롱 신부를 보필하여 거주하시면서 인근 산골의 여러 교우촌들을 돌보셨습니다. 그 가운데 삽티는 산막골과 불과 30리 정도의 거리입니다. 황석두 성인께서는 자기 조카 황천일 요한을 양자로 삼아 또 다른 조카 황기원 안드레아와 함께 삽티의 교우촌을 책임지게 하고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님을 보필하기 위해 합덕 인근 신리에 가 있게 되었는데, 1866년(병인년)에 다블뤼 주교님과 함께 체포되시어 서울로 압송됩니다. 이어서 그해 3월 30일에 충청수영 ‘갈매못’ 해변에서 그 주교님과 다른 두 분 신부님과 장주기 요셉 회장님과 함께 황석두 회장님께서 군문효수 치명하시게 됩니다. 그 후 삽티 교우촌에 거주하던 양아들 황천일 요한과 조카 황기원 안드레아가 황석두 성인의 유해를 비밀리에 수습하여 삽티에 모셔와 안장해드립니다. 그 일이 발각되어 황천일과 황기원은 체포되고 서울에 이수되어 무참히 처형당합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삽티의 교우촌은 버려져 있다가 교우들이 그곳에 비밀리 들어와 옹기를 굽고 살던 중 무슨 연유인지 그 교우촌이 없어지게 됩니다. 황석두 루카 성인의 유해가 그곳에 안장된 후 그 묘지를 누가 관리했는지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황석두 루카 성인의 고향인 충북 연풍 인근에 그분의 유해를 옮겨 모신 무덤을 1980년대에 발굴했다면서 현재 연풍 성지에 그분의 유해를 옮겨 모신 무덤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언제 누가 그곳 멀리 연풍 인근으로 이장했는지 그에 대한 증언이나 기록이 없습니다. 연풍에로의 면례(이장)에 대한 근거를 찾는 일은 아직까지 교회사 연구자들의 숙제로 남아있습니다만, 중요한 사실은 다음과 같은 증언인 것입니다.
병인 순교자들의 시복시성을 위한 조사 재판 과정 중 1922년 황 마르타의 증언이 그것입니다. 황 마르타는 황석두 성인의 조카 황기원 안드레아의 딸인데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습니다.
“(병인년의) 4월 16일(양력 5월 29일)에 나의 백부가 가서 시신을 가져왔다고 합니다. 홍산 사피(즉 삽티)에 묻었습니다. 지금은 자손이 없기 때문에 가더라도 찾지 못합니다.”(시복조사 재판 34회차 제23조목 황 마르타의 증언)
위와 같은 증언자 황 마르타는 황석두 성인의 조카의 딸이므로 성인께는 종손녀(從孫女)가 되는 입장입니다. 성인의 황씨 가문이 그분의 유해를 ‘홍산 삽티’로부터 ‘충북 연풍’으로 옮겨 모셨다면, 1922년의 이 증언 이후에 그리 했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만, 그 사실에 대해서는 오리무중입니다.
황석두 루카 성인의 치명 후 그 유해를 수습하여 홍산 삽티에 모셔온 사람은 황 마르타의 증언에 따르자면 그녀의 백부인 황 예로니모입니다. 그리고 시복재판 과정의 증언자 김치선 마태오와 김흥칠 마티아 등은 황천일 요한이 성인의 유해를 삽티에 모셔왔다고 증언합니다(시복재판 제87 및 88차 기록 참조). 황천일은 황 마르타가 증언하는 바대로 그녀의 ‘백부’ 황 예로니모와 함께 그 일을 했음이 분명하고, 황기원 안드레아는 그녀의 생부입니다. 그런데 황석두 성인을 삽티에 안장해드리는 작업을 한 황천일과 황기원은 체포되어 죽었고(치명했고), 그 후에 그 안장의 정확한 지점을 알 수 있는 ‘자손이 없기 때문에 가더라도 찾지 못한다’고 1922년에 황 마르타가 증언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주지해야 할 문제의 사실이 있습니다. 황 마르타의 증언 이후 ‘연풍 병방골’에 황석두 루카 성인의 유해를 옮겨 모신 바에 대하여 아무런 근거와 증언이 없다는 점이 문제인 것입니다.
여하튼, 삽티에 황석두 루카 성인의 유해를 안장한 1866년으로부터 1922년까지의 56년간 아무도 그 안장 지점을 알 수 없었고, 그 증언의 1922년으로부터 1980년까지의 58년간은 공백 그 자체입니다. 이에 대한 연구와 해명이 있어야 충북 연풍에 현재 조성된 황석두 루카 성인의 묘지에 대한 신빙성이 확보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홍산 삽티의 어느 지점이 황석두 루카 성인의 유해가 안장된 정확한 곳인지, 그에 대한 연구는 그 일대 광범위한 발굴 조사가 요청됩니다. 하지만 1964년에 성물을 발굴한 지점은 현재 모 가문의 사람들이 2004년도에 문중 묘역으로 조성하고 타지로부터 그 문중 선조들의 무덤을 이장해 놓았습니다. 그 문중인들은 신도시 세종시의 건설에 따라 충남 연기군에 있던 선조들의 묘지들에 대한 보상과 더불어 부여군 홍산면의 상천리 즉 삽티에 대거 문중묘역을 이전한 것입니다. 이러한 일이 벌어지기 전, 홍산 출신의 윤종관 신부는 ‘삽티’의 교회사적 중요성을 인지하고 교회 내 관계 요로에 그 해당 토지를 확보하자고 부르짖었으나 아무런 호응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2012년 말에 윤종관 신부는 성물 발굴지에서 분할된 지번의 산지를 매입하기에 이릅니다. ‘상천리 산90-14번지’(2만6천평)입니다. 그 사실을 아시게 된 교구장 유 라자로 주교님께서 2013년 5월 31일에 현지를 확인 방문하신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매입한 그곳은 속칭 ‘맹지’입니다. 모 문중이 확보하고 그들의 문중묘역으로 조성한 구역을 통과해야만 접근할 수 있는 ‘맹지’입니다. 그러나 그 문중인들은 그 통과를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2013년에 그 문중을 설득하여 통로를 마련할 수 있기 위한 구간(7백평)을 어렵사리 추가매입하기에 이릅니다. 그 문중으로서는 아무런 쓸모없다고 여기는 계곡 습지와 급경사지를 분할 매입한 것입니다. 일련의 이러한 토지 매입과정은 속된 말로 ‘바가지 쓰면서’ 이루어진 일입니다. 그 모든 일은 큰 덩어리의 부채를 떠안고 이루어졌습니다만, 그 계곡 습지와 급경사지를 길로 만들어야 할 추가적 숙제를 포함한 것이었습니다. 그 추가 숙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금년(2015년)의 여름에 토목공사를 벌이고 있습니다. 모든 일이 눈덩이처럼 계속 불어나는 부채와 더불어 진행되고 있습니다.
위대한 치명자 황석두 루카 성인의 유해를 모신 곳에 우리 순례자들께서 기도하기 위해 접근할 수 있는 날, 그날을 바라보면서 공사를 하고 있는 현장을 하부내포성지 홈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 에서 사진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하부내포성지 홈카페는 한글로 그냥 <하부내포성지>라고 치면 곧바로 들어가 보실 수 있습니다.
‘삽티 성지’에 진입할 수 있는 길을 완성하게 되면, 그곳에서 황석두 루카 성인의 순교 신앙을 가슴에 새기는 순례자들께서 그곳으로부터 산길을 더 걸어 천덕산 자락의 ‘옛 삽고개’를 넘어 ‘도앙골’에 이를 수 있습니다. 그 순례 경로는 3.5㎞ 가량의 산길입니다. 그 순례의 산길을 걸으면, 옛적 삽티 마을과 도앙골에 숨어살면서 서로 오가는 비밀 내통으로 함께 신앙을 다지고 위로를 삼던 옛 교우들의 심정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도앙골’의 비밀 교우촌에 숨어 쉬면서 최초의 사목 보고서를 작성하시던 최양업 신부님께서도 아마 그 산길 비밀 통로를 통하여 ‘삽티 마을’의 교우들을 찾아 격려하셨겠지요! 그리고 ‘삽티 마을’에 황석두 루카 성인의 유해를 모시던 그 일에 아마 산 넘어 ‘도앙골’의 교우들도 함께하였을 것으로 추정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한 ‘삽티’와 ‘도앙골’에 숨어 살면서 서로 위로 격려하며 신앙을 지키던 그 교우들은 병인년과 그 다음해 정묘년과 또 그 다음 무진년에 모두 끌려가 치명하였습니다.
그러한 ‘삽티’와 ‘도앙골’의 통로는 또 월명산 자락을 넘어 ‘서짓골’에까지 연결됩니다. 그 연결되는 산길 따라 ‘도앙골’의 김순장 요한 크리소스토모가 ‘서짓골’에 달려가서 다블뤼 안토니오 성인 주교님과 두 분 성인 신부님과 장주기 요셉 성인의 유해를 갈매못으로부터 모셔 안장하는 일에 합세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삽티’에서 ‘도앙골’에 이르는 옛 교우들의 산길 비밀 통로는 또 ‘도앙골’에서 ‘서짓골’에 이르는 산길 넘어 계곡의 길을 따라 연결 됩니다. 그 길은 현재의 보령댐 호반도로를 따라 연결 되는 순례길이 됩니다. 그러한 순례의 길을 일컬어 ‘하부내포성지 도보순례로’라 하여 우리가 신앙 선조들의 숨결을 느끼며 기도할 수 있기를 소망하면서 그 길의 기반조성작업을 하고 있는 현황을 사진으로 하부내포성지 홈카페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작업현장의 사진에 앞서 ‘삽티 성지’와 ‘도앙골 성지’의 산길 약도를 첨부파일의 사진으로 실어드립니다. 그 약도의 아래 파란색으로 표시된 구간이 현재 토목공사로 이루어지고 있는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