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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쓴이 : 관리자
  • 작성일 : 2013-06-21 17:3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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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권고] 중동교회(Ecclesia in Medio Oriente)

베네딕토 16세 교황 성하의
주교대의원회의 중동 특별 총회 후속 권고


중동 교회
Ecclesia in Medio Oriente

2012. 9. 14.

중동 교회, 친교와 증언에 관하여
주교와 신부,
봉헌 생활자와 평신도에게 보내는
교황 권고

서 론

1. 중동 교회는 그리스도 신앙의 여명기부터 줄곧 이 은혜로운 땅의 나그네로서, 하느님과 이웃과 이루는 친교의 삶을 오늘날에도 담대히 증언하고 있습니다. 친교와 증언! 이것이 바로 주교대의원회의 중동 특별 총회에 영감을 준 신념입니다. 우리 주교들은 2010년 10월 10일부터 24일까지 베드로의 후계자를 중심으로 주교대의원회의 중동 특별 총회에 모여, “중동 교회, 친교와 증언. ‘신자들의 공동체는 한마음 한뜻이 되었다’(사도 4,32)”는 주제에 관하여 논의하였습니다.

2. 제삼천년기에 들어선 이 때, 저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힘을 길어 올리는 이 신념에, 하나이고 거룩하고 보편되며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의 모든 목자들이 사목적 관심을 갖기를 바랍니다. 또한 특별히 로마 주교와 일치하여 중동 가톨릭 교회를 보살피는 존경하는 형제 총대주교, 대주교, 주교들에게도 이 신념을 전합니다. 이 지역 주민들 가운데에는 동방 가톨릭 자치 교회들에 속한 신자들이 있습니다. 이 동방 교회들로는 콥트 알렉산드리아 총대교구, 안티오키아 총대교구(그리스 멜카이트, 시리아, 마론), 칼데아 바빌로니아 총대교구, 아르메니아 킬리키아 총대교구가 있습니다. 또한 라틴 교회의 주교, 신부, 평신도들도 이 지역에서 살고 있습니다. 시로 말라바르의 에르나쿨람 안가말리 상급 대교구와 시로 말란카르의 트리반드룸 상급 대교구 출신의 인도 신부들과 신자들도 있습니다. 그밖에도 아시아와 동유럽의 동방 교회와 라틴 교회 신부들과 신자들도 있고,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레아에서 온 신자들도 많습니다. 이들은 함께 그들 전통의 다양성 속에서 신앙의 일치를 증언합니다. 저는 또한 이 신념을 중동의 모든 사제와 수도자, 평신도에게 맡기고자 합니다. 이 신념으로 각자가 자신의 소속 교회에서 수행하는 봉사나 사도직 활동이, 성령께서 모든 이의 교화를 위하여 베푸신 은사에 따라, 확고해지리라 확신합니다.

3. 그리스도 신앙의 관점에서, “친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전달되는 하느님의 생명 그 자체입니다.”1) 친교는 우리의 자유에 호소하고 우리의 응답을 기다리는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친교가 보편적 차원을 지니는 것은 바로 하느님께 그 기원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친교는 분명히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신앙을 나누는 그리스도인들을 아우르지만, 유다인과 무슬림 형제자매들, 그리고 다양한 방식으로 하느님 백성을 이루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열려 있습니다. 중동 가톨릭 교회는 먼저 자신 안에 친교를 되살리지 않는다면, 곧 중동의 각 교회들의 품 안에서 그리고 그 모든 구성원인 총대주교, 주교, 신부, 수도자, 봉헌 생활자, 평신도 사이에 친교를 되살리지 않는다면, 교회 일치와 종교간 차원에서 이 친교를 온전히 드러낼 수 없음을 알고 있습니다. 신자들의 신앙생활이 깊어지고 내적인 영적 쇄신이 이루어진다면 가톨릭 교회는 충만한 은총의 삶을 살고 하느님을 닮아 거룩해질(theosis) 것입니다.2) 이렇게 하여 교회의 증언은 더욱 신뢰할 만한 것이 될 것입니다.

4. 예루살렘 첫 공동체가 보여 준 모범은, 오늘날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증언을 위한 친교의 자리가 될 수 있도록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쇄신하기 위한 본보기가 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은 성령 강림 날에 탄생한 이 공동체, 곧 한마음 한뜻이 된 신자 공동체에 대하여 간단하면서도 감동적인 이야기를 들려줍니다(사도 4,32 참조). 초기부터,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교회의 친교 사이에는 근본적인 유대가 있었습니다. 친교는 한마음 한뜻이라는 서로 호환되는 두 표현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친교는 우리 인간만의 노력의 결과가 아닙니다. 친교는 다른 무엇보다도, 우리 안에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을 생기게 해 주시는 성령의 힘을 통하여 생겨납니다(갈라 5,6 참조).

5. 사도행전에 따르면, 신자들의 일치는 그들이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친교를 이루며 빵을 떼어 나누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였다.”(사도 2,42)는 사실로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신자들의 일치는,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하느님 말씀의 선포) 이에 한결같은 믿음으로 응답하며, 형제적 친교를 이루고(사랑의 섬김), 빵을 떼어 나누며(성찬례와 모든 성사들), 개인으로 또 공동으로 기도함으로써 자라났습니다. 바로 이 네 가지를 주축으로 하여 첫 신자 공동체 안에 친교와 증언이 이룩된 것입니다. 사도 시대부터 우리 시대까지 중동에서 계속 현존해 온 교회가 초기 공동체를 본보기로 삼아 그 안에서, 자신의 기원에 대한 기억과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활력을 생생히 유지하는 데에 필요한 원천들을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6. 주교대의원회의 중동 특별 총회에 참석한 모든 이는 지리적 종교적 문화적 사회 정치적으로 매우 다양한 상황들 속에서도 가톨릭 교회 안에 존재하는 일치를 체험하였습니다. 신학, 영성, 전례, 규범의 다양한 표현 가운데에서도 공통의 신앙이 실천되고 훌륭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동방 교회 예법들은 사도로부터 교부들을 통하여 이어오는 전통을 밝혀 주고 그 다양성 안에서 가톨릭 신앙의 거룩한 일치를 강조하는 그리스도 교회 전체의 자산입니다.” 베드로좌의 제 선임자들처럼, 저 역시 여기에서 “이러한 동방 교회 예법들이 경건하게 지켜지고 증진되도록”3) 보장하고자 하는 저의 의지를 거듭 밝히고자 합니다. 또한 저는 모든 것 가운데 으뜸인 사랑의 계명과 법 규범에 따라, 라틴 예법을 따르는 형제자매들의 필요와 요구를 언제나 애정 어린 관심으로 살필 것을 약속드립니다.

제1부
“우리는 기도할 때에 여러분을 모두 기억하며 늘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1테살 1,2)

7. 바오로 성인께서 하신 이 감사의 말씀으로, 저는 중동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 여러분에게 인사드리며 여러분을 위하여 늘 열심히 기도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가톨릭 교회와 그리스도인 공동체 전체는 여러분을 기억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건설하는 데에 이바지해 온 여러분의 숭고하고 오랜 공로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여러분의 충실한 믿음에 감사하며 여러분에 대한 한결같은 사랑을 약속드립니다.

중동의 상황

8. 저의 중동 여행을 떠올리면 아직도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하느님께 특별히 선택받은 이 땅은 성조들과 예언자들의 고향입니다. 중동은 메시아께서 강생하신 영광스러운 장소입니다. 중동은 구원자의 십자가가 드높여지는 것을 보았고, 구세주의 부활과 성령의 강림을 목격하였습니다. 사도들과 성인들과 수많은 교부들이 거쳐 간 이 땅은 최초의 교리가 정립된 현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복 받은 땅과 여기서 살아온 민족들은 인간적으로 비극적인 격동을 겪어 왔습니다. 인간의 눈먼 욕심으로 수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거나 삶이 피폐해졌으며, 숱한 두려움과 수모도 겪어 왔습니다.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된(창세 1,27 참조) 아담과 하와의 자손들 사이에서 카인의 범죄는 끝 없이 되풀이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창세 4,6-10; 1요한 3,8-15 참조). 아담의 죄는 카인의 죄로 가중되어 오늘날에도 계속해서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돋우고 있는 것입니다(창세 3,18 참조). 이 복 받은 땅이 고통 받고 있는 모습을 보니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이 땅의 자녀들이 서로 잔인하게 찢고 찢기며 죽어가고 있습니다. 부활하시고자 고통과 죽음을 겪어 내신 예수님만이 여기에서 살아가는 모든 이에게 구원과 평화를 가져다주실 수 있다는 사실을 그리스도인들은 알고 있습니다(사도 2,23-24.32-33 참조). 우리가 선포하는 분은 바로 그리스도이시고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그분 한분뿐입니다. 따라서 “죄가 지워지게” 참회하고 회개하도록 합시다. “그러면 다시 생기를 찾을 때가 주님에게서 올 것”(사도 3,19-20)입니다.

9. 성경에 따르면, 평화는 그저 평온한 삶을 보장하는 협정이나 조약이 아닙니다. 평화에 대한 정의가 단순히 전쟁이 없는 상태로 축소될 수도 없습니다. 히브리어 어원상 평화의 의미는 완전한, 손상되지 않은, 온전함을 회복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는 하느님과 자신과 다른 이들과 자연과 조화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상태입니다. 평화는 외적으로 드러나기 이전에 내적인 것입니다. 평화는 복입니다. 평화는 실재에 대한 갈망입니다. 평화는 중동에서 인사말이 될 정도로 좋은 말입니다(요한 20,19; 1베드 5,14 참조). 평화는 정의입니다(이사 32,17 참조). 야고보 성인은 그의 서간에서 이러한 말씀을 덧붙이십니다. “의로움의 열매는 평화를 이루는 이들을 위하여 평화 속에서 심어집니다”(야고 3,18). 예언자들의 고군분투와 지혜서 저자들의 성찰은 종말론적 평화에 대한 희망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하느님 안에서 누리는 바로 이 참다운 평화로 이끄십니다. 그리스도 홀로 평화의 문이십니다(요한 10,9 참조). 이 문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 들어가고자 하는 유일한 문입니다.

10. 의인을 “하느님의 자녀”가 되도록 부르시는 그리스도의 초대에 응답하려면(마태 5,9 참조), 하느님께 돌아서고 가까운 이웃과 공동체 안에서 용서의 삶을 사는 것부터 시작하여야 합니다. 온유한 이들만이 한없는 평화를 누리며 기뻐할 것입니다(시편 37[36],11 참조).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하느님과 친교의 삶을 살아가게 해 주시고, 죄로 일그러진 형제애가 아닌, 참다운 형제애를 만드십니다.4)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몸으로 유다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시고 이 둘을 가르는 장벽인 적개심을 허무셨습니다”(에페 2,14).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의 평화 정책들이 하느님의 정의와 사람들 사이의 정의를 기반으로 하여, 분열의 근원이 되는 죄에 맞서 싸울 때에 비로소 그 실효를 거두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인종, 성별, 사회 신분에 따른 모든 차별을 극복하고자 합니다(갈라 3,28; 콜로 3,11 참조).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가 하나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러한 연유로, 교회는 전 세계에서 특히 중동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평화를 위한 모든 노력을 지지하고 격려합니다. 교회는 사람들의 평화로운 삶을 위하여 다양한 방식으로 아낌없는 노력을 펼치고 있고, 평화를 굳건히 하는 국제 법률 체계도 지지합니다. 중동 지역에 비극적인 고통을 주고 있는 여러 분쟁들에 관한 성좌의 입장, 그리고 예루살렘과 성지의 지위에 관한 성좌의 입장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5) 그러나 교회는 무엇보다도 평화가 성령의 열매이고(갈라 5,22 참조), 하느님께 끊임없이 간청하여야 하는 것임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마태 7,7-8 참조).

그리스도인과 교회 일치의 삶

11. 강압적이고 불안정하며 최근 들어 폭력으로 치닫곤 하는 상황 속에서도 하느님께서는 당신 교회가 성장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교회는 놀랄 만큼 다양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중동에는 가톨릭 교회와 더불어 유서 깊은 교회들, 비교적 최근에 세워진 교회 공동체들이 매우 많이 있습니다. 이러한 모자이크 때문에, 각 교회가 지닌 부요함을 존중하면서 일치를 도모하고 복음 선포와 그리스도인 증언에 대한 신뢰를 깊이 다지려는 뜻 깊고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6) 일치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성령의 선물로서 부단한 인내심을 가지고 꾸준히 키워나가야 하는 것입니다(1베드 3,8-9 참조). 분열의 장벽이 우리를 가로막을 때, 바오로 사도의 현명한 충고(1코린 6,7-8 참조)를 잊어버리고 순전히 인간적 기준에 호소하려는 유혹을 느낀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바오로 사도는 다음과 같이 권고합니다.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십시오”(에페 4,3). 신앙은 참된 교회 일치 운동의 중심이고 열매입니다.7) 우선 신앙 자체가 깊어져야 합니다. 일치는 지속적인 기도와 회개에서 비롯됩니다. 회개는 우리가 진리에 따라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갈 수 있게 해 줍니다(에페 4,15-16 참조).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영적 일치 운동’을 장려하였습니다. ‘영적 일치 운동’이란 참다운 교회 일치 운동의 정신입니다.8) 중동의 상황은 그 자체로 삶의 성화를 향한 절박한 호소가 됩니다. 순교록들은 모든 교회 공동체의 성인들과 순교자들이 영광스러우신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이 자유로운 일치를 보여 주는 산 증인들임을 입증해 줍니다. 이 일치는 그리스도 안에서 결정적인 화해를 이룬 백성으로 우리가 ‘하나 됨’을 미리 맛보게 해 주는 것입니다.9) 이러한 까닭에 가톨릭 교회 안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증언하는 친교를 강화할 필요가 있습니다.

12.「일치 운동 지침」10)에 제시된 규정들을 바탕으로 하여, 가톨릭 신자들은 본당과 수도원, 학교, 대학교, 신학교에서 영적 일치 운동을 촉진할 수 있습니다. 목자들은 신자들이 삶의 모든 영역에서 스스로가 친교의 증인이라는 것을 자각할 수 있게 해 주어야 합니다. 이 친교는 물론 무질서가 아닙니다. 참된 증언은 다른 이들을 인정하고 존중할 것을 요구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진리 안에서 대화를 나누려는 열린 마음가짐과, 사랑의 한 표현인 인내가 있어야 합니다. 또한 하느님과 이웃 앞에서 죄인임을 스스로 인정하는 이들의 단순함과 겸손을 가지고, 개인적 차원에서든 공동체 차원에서든 용서하고 화해하고 기억을 정화하는 역량을 지녀야 합니다.

13. 저는 끊임없이 일치를 위하여 일하는 신학자들의 노력을 격려하고, 여러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지역 교회 일치 위원회들의 활동과 친교와 형제애를 증진하는 가운데 그토록 바라던 일치를 위하여 기도하고 행동하는 다양한 공동체들의 활동에 감사의 뜻을 전합니다. 교회의 기원과 살아있는 전통에 충실한 가운데, 인간의 진리, 가정, 성, 생명 윤리, 자유, 정의, 평화 등, 커다란 도덕적 문제들에 대하여 모든 이가 한 목소리를 내는 것도 중요합니다.

14. 한편, ‘섬김의 교회 일치 운동’은 자선과 교육의 분야에서 서로 다른 교회들과 교회 공동체들의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이미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중동 지역의 여러 다양한 그리스도교 전통의 지역 교회들이 모이는 중동교회협의회는 사랑과 상호 존중 속에 대화가 이루어질 수 있는 희망의 자리를 마련해 줍니다.

15.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 일치 여정이 실효를 거두려면 “무엇보다 기도, 생활의 모범, 동방의 옛 전통에 대한 충실, 폭넓은 상호 이해, 물심양면의 형제적 협력과 존중”11)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지적하였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께 더욱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 가장 바람직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믿고 사랑하는 이들을 일치로 이끄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아버지의 영과 당신 어머니이신 마리아를 그들에게 주십니다(요한 14,26; 16,7; 19,27). 이 이중의 선물은 서로 다른 차원에서 강력한 도움의 원천이 될 수 있고, 모든 이가 더욱 큰 관심을 기울일 만한 것입니다.

16. “죄를 저지르지도 않았고 그의 입에는 아무런 거짓도 없었던”(1베드 2,22) 그리스도, 그분에 대한 우리의 공통된 사랑과, 완전한 친교를 이루고 있지 않은 동방 교회들과 가톨릭 교회 사이의 ‘긴밀한 유대’12)가 대화와 일치로 나아가도록 우리를 재촉하고 있습니다. 가톨릭 신자들은 동방 교회들과 완전한 친교는 이루고 있지는 않지만 공통의 종교적 기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여러 모로 연관이 있습니다. 공통 증언이라는 전망에서 교회 일치 사목 활동을 쇄신하려면, 고해성사, 성체성사, 병자성사를 위한 성사 교류(communicatio in sacris)를 허용하는 공의회의 열린 뜻을 분명히 이해하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13) 일부 상황에서는 특정 규범에 일치하여 교회 권위의 승인을 받아 이루어지는 성사 교류가 가능할 뿐만 아니라 권장되기도 합니다.14) 가톨릭 신자와 정교회 신자 사이의 혼인이 많아서 교회 일치 차원에서 각별한 관심이 필요합니다.15) 저는 이렇게 혼인한 부부가 있는 곳에서 가능하다면, 가톨릭 교회와 동방 교회의 주교들이 공동 교회 일치 사목을 점진적으로 실행하기 위한 사목적 합의를 이룰 것을 장려합니다.

17. 교회 일치는 전통과 예식의 획일화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우선, 저는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필요하다면 주님의 기도를 고유 지역 언어로 공동 번역하는 데에 합의를 이끌어낼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16) 같은 말로 함께 기도할 때, 그리스도인들은 그들 공통의 뿌리가 하나이고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신앙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 신앙을 토대로 우리는 완전한 친교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관련 교회법 규범을 올바로 적용하는 가운데, 우리가 함께 동방 교부들과 라틴 교부들에 관하여 그리고 우리 각자의 영성 전통에 관하여 더 깊이 연구한다면 교회 일치에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18. 저는 중동 가톨릭 신자들이 그 지역의 여러 다른 교회 공동체들의 신자들과 관계를 키워 나가기를 당부합니다. 다양한 공동 노력들을 펼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성경을 함께 연구하고 널리 전파하는 것이 이 여정의 출발점이 될 수 있습니다. 특히 자선 활동 분야와, 인간 생명, 정의, 평화의 가치를 증진하는 데에서 효과적인 협력이 더욱 폭넓게 발전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서로에 대하여 더 잘 이해하고 존중하는 분위기를 만드는 데에 기여할 것입니다. 이는 형제애를 증진하는 데에 반드시 필요한 조건입니다.

종교간 대화

19. 교회는 그 보편적 성격과 소명이 요구하는 대로 다른 종교인들과 대화를 나누어야 합니다. 중동에서 이 종교간 대화의 토대는 그리스도인을 유다인과 무슬림과 결합시켜 주는 정신적 역사적 유대입니다. 이 대화는 주로 정치적 또는 사회적 질서를 실질적으로 숙고해 보는 것이 아니라 신앙에 관한 신학적 관심사를 바탕으로 하여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는 성경에 근거하고,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 「인류의 빛」(Lumen Gentium)과 비그리스도교와 교회의 관계에 대한 선언 「우리 시대」(Nostra Aetate)에서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17) 유다인과 그리스도인과 무슬림은 똑같이 모든 사람을 창조하신 한분이신 하느님을 믿습니다. 유다인과 그리스도인과 무슬림이 하느님께서 인류 가족의 일치와 조화를 바라신다는 것을 재발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유다인과 그리스도인과 무슬림은 다른 신자들 안에서 존중받고 사랑받아야 하는 형제자매들을 발견하고 그들 자신의 땅에서부터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평온과 화합을 이루고 있는 아름다운 모습을 증언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한 분이신 하느님에 대한 인식이 순수한 마음으로 생활 속에서 실천될 때, 참다운 신자들에게는 결코 정당화될 수 없는 끝없는 분쟁에 이용되기보다, 오히려 중동 지역의 평화를 이룩하고 그 지역 주민들이 서로 존중하며 공존하는 데에 크게 이바지할 수 있습니다.

20. 그리스도인과 유다인을 이어 주는 깊은 유대는 많습니다. 이는 소중한 공통의 영적 유산에 뿌리를 둔 것입니다. 여기에는 물론, 인간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시고 무한한 우정을 보여 주시며 사랑으로 우리의 구원을 바라시는 한 분이신 창조주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있습니다. 또한 유다인과 그리스도인에게 많은 부분에서 공통된 성경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과 유다인 모두에게 성경은 하느님 말씀입니다. 성경을 가까이한다는 공통점이 우리를 서로 가깝게 해 줍니다. 나아가, 예수님께서는 선택된 민족인 유다인의 후손으로 태어나 사시고 돌아가셨습니다(로마 9,4-5 참조). 마찬가지로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를 통해서도 우리는 그리스도교의 뿌리가 유다 민족에게 있음을 재발견하게 됩니다. 이 긴밀한 유대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자랑하는 유일무이한 자산으로 선택된 민족에 힘입은 것입니다. 그 ‘나자렛 사람’이 유다인이라는 사실은 그리스도인들이 약속의 세상을 기쁘게 맛볼 수 있게 하고 결정적으로 선택된 백성의 믿음으로 이끌어 그들 역시 선택된 백성의 일원이 되게 해 줍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인성과 그분의 깊은 본질적 신원에서 그들은 갈라져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께서 메시아,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알아보기 때문입니다.

21. 그리스도인들이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려면(신명 6,5 참조) 강생의 신비의 깊이를 더 잘 알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시어 한 민족과 그 신앙 전통과 문화 안에 들어오셨습니다. 이에 대하여 더 잘 알수록 그리스도 신앙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덕분에 이를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습니다(루카 24,26 참조). 그렇다 하여도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자기 뿌리를 알고 이에 감사하여야 합니다. 사실, 고목에 접붙여진 가지가 잘 자라려면 뿌리에서 올라오는 수액이 필요합니다(로마 11,17-18 참조).

22. 신앙인들의 공동체인 이 둘의 관계는 인간적 감정들과 역사의 상처로 얼룩져 있습니다. 서로에 대한 오해와 불신이 쌓여 왔습니다. 과거에 교묘하게 또는 폭력적으로 자행된 박해들은 용서받을 수 없고 크게 비난받아 마땅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비극적 상황에도 불구하고 수세기 동안 두 공동체가 일구어 온 매우 풍성한 상호 관계는 이른바 유다-그리스도교라는 문화와 문명의 탄생과 번영에 이바지하였습니다. 이 두 세계가 여러 이유에서 서로 다르고 반대된다고 주장하면서도, 인류를 숭고한 결합으로 이끄는 데에는 서로 일치하기로 결심한 것처럼 말입니다. 유다인과 그리스도인을 분열시키기도 하지만 일치시키기도 하는 이 유대를 통하여 이 두 공동체는 열린 마음으로 서로에 대한, 서로 함께하는 새로운 책임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18) 두 백성 모두 신뢰심을 가지고 형제애를 향하여 나아갈 수 있도록 같은 축복과 영원한 약속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23. 가톨릭 교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라, 존중하는 마음으로 무슬림을 바라봅니다. 무슬림은 무엇보다도 기도와 자선과 단식을 통하여 하느님을 흠숭하고,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인정하지는 않지만 예언자로 받들며, 또 그분의 어머니이신 동정 마리아를 공경합니다. 이슬람교와 그리스도교의 만남이 흔히 교리 논쟁의 형태로 이루어졌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양쪽 모두 교리적 차이를, 종교라는 명목으로 불용과 차별과 소외, 심지어 박해까지 자행하며, 이를 정당화하는 구실로 이용해 왔습니다.19)

24. 그럼에도, 그리스도인들은 중동에서 날마다 무슬림과 더불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중동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존재는 최근에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오랜 역사를 지닌 것입니다. 수세기에 걸쳐 그리스도인들은 중동 지역의 구성원으로, 귀감이 될 정도로 주변 이웃과의 관계를 발전시켜 왔습니다. 무슬림의 경건한 신심에 도전을 받으면서도 고유의 방식대로 가능한 선에서 그들과 나란히 살아가면서 주변 문화 속에 복음의 가치를 증진시켜 왔습니다. 그 결과, 특별한 형태의 공존을 이루어 왔습니다. 따라서 중동 고유의 풍요로운 문화를 형성하는 데에 이바지한 유다인과 그리스도인과 무슬림의 공로를 인정하는 것이 마땅합니다.20)

25. 중동 가톨릭 신자들은 대다수가 중동 지역에서 태어난 시민으로서 국가의 발전을 위하여 일하면서 국민 생활에 온전히 참여할 의무와 권리가 있습니다. 그들은 온전한 시민권을 행사하여야 하고, 이등 시민이나 종교인으로 대우받아서는 안 됩니다. 중동 가톨릭 신자들이 과거에 아랍 르네상스의 선구자로서 그 지역의 다양한 문명이 낳은 문화, 경제, 학문 생활에 온전히 참여하였듯이, 오늘날에도 그들의 경험을 무슬림과 함께 나누면서 구체적인 공헌을 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인간 존엄성과 이에 따른 종교 자유에 민감한 것은 바로 예수님 때문입니다. 하느님과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그렇게 그리스도의 두 본성에 영예를 드리면서 영원한 생명의 관점에서, 그리스도인들은 학교와 병원을 비롯하여 모든 사람이 차별 없이 환영받는 각종 단체들을 설립해 왔습니다(마태 25,31이하 참조). 이러한 이유로, 그리스도인들은 인간의 기본권에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권리들이 오직 ‘그리스도교적’ 인권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이는 출신이나 종교적 신념이나 정치적 성향과 무관하게 모든 인간과 모든 시민의 존엄과 관련된 권리들입니다.

26. 종교 자유는 모든 자유의 절정입니다. 이는 양도할 수 없는 신성한 권리입니다. 여기에는, 개인이나 공동체가 종교 문제에서 양심을 따를 자유와 함께 예배의 자유가 포함됩니다. 종교 자유는 자신의 판단으로 종교를 선택할 자유와 자신의 신앙을 공공연히 표명할 자유를 포함합니다.21) 자신의 생명과 개인의 자유가 위험해지는 일 없이 자신의 종교와 그 상징들을 자유로이 천명하고 드러낼 수 있어야 합니다. 종교 자유는 인간 존엄성에 뿌리를 둔 것입니다. 종교 자유는 도덕적 자유를 보호하고 상호 존중을 촉진합니다. 유다인들은 오랫동안 자주 심한 적의에 시달려 왔기에 종교 자유가 얼마나 은혜로운 것인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무슬림도 종교 문제에서 폭력 사용은 말할 것도 없고 어떠한 강요도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는 확신을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공유하고 있습니다. 개인과 사회, 문화, 정치, 행정의 차원에서 다양하고도 교묘한 형태를 취할 수 있는 그러한 강요는 하느님의 뜻에 반하는 것입니다. 이는 정치적 종교적 착취, 차별, 폭력을 불러일으켜서 죽음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죽음이 아니라 생명을 원하십니다. 그분께서는 모든 살인을 금지하셨고, 심지어 살인자까지도 죽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창세 4,15-16; 9,5-6; 탈출 20,13 참조).

27. 종교 관용은, 많은 나라에 존재하지만 실제 허용 범위가 제한되어 있어서 그다지 큰 실효를 거두고 있지 못합니다. 이제 관용을 뛰어넘어 종교 자유로 나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이러한 진보가 일부 사람들이 주장하듯 상대주의로 가는 문을 여는 것은 아닙니다. 이는 믿음을 위태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과 종교, 그리고 인간과 하느님의 관계를 다시 한 번 숙고해 보게 합니다. 이는 신앙의 “근본 진리”를 공격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과 종교가 서로 다르다 하더라도, 진리의 광채는 모든 사람을 비춥니다.22) 진리는 하느님과 동떨어져 자율적인 실재로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만일 그러하다면, 그것은 우상일 것입니다. 진리는 하느님을 향해 열린 이타성 안에서만 펼쳐질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내 인류 형제자매를 통하여 그들 안에서 당신 고유의 이타성을 드러내시고자 하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내가 진리를 소유하고 있다.”고 배타적으로 우기는 것은 맞지 않습니다. 진리는 누군가의 소유물이 아니라 은총입니다. 곧, 진리에 더욱 깊이 동화되는 여정으로 나아가도록 우리를 부르는 은총입니다. 진리는 자유를 통하여 비로소 알고 체험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진리를 다른 이들에게 강요할 수 없습니다. 진리는 사랑을 만날 때에만 드러납니다.

28. 전 세계의 관심이 자기 길을 찾아가는 중동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더불어 사는 공존은 이상향에 불과한 것이 아니고 불신과 편견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 지역이 입증해 주기를 바랍니다. 종교들은 공동선을 위하여 서로 협력하고 모든 사람의 발전과 사회 건설에 이바지할 수 있습니다. 중동의 그리스도인들은 수세기 동안 무슬림과 그리스도인의 대화를 실천해 왔습니다. 그들에게 이것은 일상생활 안에서 서로의 일상을 나누는 대화입니다. 중동의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대화의 풍요로움과 한계를 모두 알고 있습니다. 최근 들어, 유다인과 그리스도인의 대화도 실천하고 있습니다. 또 얼마 전부터는 유다인, 무슬림, 그리스도인 지식인들이나 신학자들 사이에 양자 또는 삼자 대화가 이루어져 왔습니다. 이러한 대화는 다양한 연구와 만남의 유익한 기회가 되기에 적극 장려해야 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철학과 신학과 기타 학문의 연구를 위한 중동의 모든 가톨릭 학교나 연구소들이 효과적인 기여를 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오래 전부터 이 지역에 존재해 왔고 때로는 힘든 상황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가톨릭 학교나 연구소에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계속해서 평화의 일꾼이 되어 주도록 격려합니다. 무지를 타파하고 학문을 증진하고자 기울인 그 모든 노력은 지지받아 마땅합니다. 일상의 대화와 지식인이나 신학자들의 대화가 알맞게 결합된다면,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유다인과 그리스도인, 유다인과 무슬림, 무슬림과 그리스도인 사이의 관계 개선에 더디지만 확실히 기여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저의 희망이고 제 기도 지향입니다.

두 가지 새로운 현상

29. 세계의 다른 곳들과 마찬가지로, 중동도 상반되는 두 가지 현상을 겪고 있습니다. 하나는 이따금 극단적인 결과를 낳는 세속화이고, 또 하나는 종교를 바탕으로 한다고 주장하는 폭력적인 근본주의입니다. 정치적 종교적 공동체를 막론하고 이를 이끄는 중동의 지도자들 가운데 일부는 대단히 의심스런 눈으로, 세속성(laicite)이 근본적으로 무신론이나 비도덕적인 것이라고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세속성이 때로는 종교를 순전히 개인의 관심사로 축소시켜, 개인이나 가정의 예배를 일상생활이나 윤리나 대인 관계와 무관한 것으로 보기도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세속성이 극단적이고 관념적인 형태를 취하면 세속주의가 됩니다. 세속주의는 시민들이 공개적으로 자기 종교를 표현할 권리를 부인하고 오직 국가만이 법으로 종교의 공적 형태를 정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이론들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이는 비단 서양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닙니다. 또한 그리스도교와 혼동되어서도 안 됩니다.

한편, 건전한 세속성은, 종교가 정치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하고, 정치도 종교의 기여로 풍요로워지게 하며, 종교와 정치가 서로 필요한 거리를 유지하고 명확한 구분을 두며 필수불가결한 상호 협력을 하게 해 줍니다. 정치와 종교가 계속해서 서로를 병합하거나 깎아내리려 하는 유혹을 피하지 않고 상호 존중의 정신을 가지지 않는다면, 어떠한 사회도 건전한 발전을 이룰 수 없습니다. 정치와 종교의 건설적인 관계는 무엇보다도 인간성, 곧 인간에 대한 건전한 이해와 양도할 수 없는 인권에 대한 전적인 존중을 바탕으로 합니다. 이 올바른 관계에 대한 인식은, 정신 분야(종교)와 현세 분야(정치)의 관계가 서로 구별되면서도 일치되어야 한다는 이해로 이어져야 합니다. 두 분야 모두 언제나 구별되어야 하지만 공동선을 위하여 조화롭게 협력하도록 요청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건전한 세속성은 정치 활동이 종교를 조종하지 않도록 보장하고, 종교 생활이 이익에 좌우되는 정치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 줍니다. 이익을 따르는 정치는 때로는 종교적 신념과 거의 양립될 수 없거나 아니면 완전히 반대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구별 속의 일치를 구현하는 건전한 세속성은 두 분야 모두를 위하여 필요하고, 필수적이기까지 합니다. 정치와 종교의 관계에서 야기되는 도전들은 적절한 인성 교육과 종교 교육을 통하여 인내와 용기를 가지고 대처할 수 있습니다. 개인과 가정과 시민 생활에서 하느님의 자리를 계속 강조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하느님의 계획 속에서 사람들의 올바른 자리도 강조하여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더욱 기도해야 합니다.

30. 경제적 정치적 불안정, 일부 사람들의 능란한 조작력, 종교에 대한 그릇된 이해는 종교 근본주의로 가는 문을 여는 데에 일조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모든 종교 공동체에 피해를 주고 오랫동안 더불어 살아온 그들의 전통을 부인합니다. 이는 정치적 이유로 때로는 폭력을 사용하여 개인적 양심과 종교 자체를 지배하는 힘을 얻으려고 합니다. 저는 이 지역의 유다교와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의 종교 지도자들에게 절박하게 호소합니다. 종교 지도자들의 모범과 가르침을 통하여, 모든 종교인에게 무차별적으로 치명적인 악영향을 미치는 이러한 위협을 없애는 데에 온 힘을 다해 주기를 당부합니다. “우리의 이익과 쉽고 편리한 정책과 폭력을 정당화하려고 계시된 말씀, 성경이나 하느님의 이름을 이용하는 것은 매우 중대한 잘못입니다.”23)

이민

31. 중동의 현실은 그 다양성으로 풍요롭지만, 제약이나 심지어 폭력이 빈번합니다. 이는 그 지역의 모든 주민과 그들 삶의 모든 측면에 영향을 끼칩니다. 흔히 난처한 입장에 처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분쟁과 불안한 상황의 부정적인 여파들을 절감하면서 때로는 지치고 희망도 없어 보입니다. 그들은 자주 수모를 겪고 있습니다. 그들은 경험을 통하여, 골치 아픈 사건이 발생할 때 흔히 그들 자신이 그 피해자임을 알고 있습니다. 수세기에 걸쳐 각자 자기 나라의 성장에 적극 참여하고 그들의 정체성 확립과 번영에 이바지해 왔던 그리스도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미래, 그들 가족들이 품위 있고 안전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평화로운 곳, 여러 제약에 대한 걱정 없이 공공연하게 자신의 신앙을 표현할 수 있는 자유로운 곳을 찾고 있습니다.24) 이것은 가슴 아픈 선택입니다. 또한 개인과 가족과 교회에 깊은 영향을 줍니다. 이는 민족들을 단절시키고 중동을 인간적 문화적 종교적으로 가난하게 만듭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없거나 소수만 있다면 중동은 더 이상 중동이 아닐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종교인들과 함께 이 지역만의 특별한 모습을 빚어내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은 하느님 앞에서 서로에 대하여 책임이 있습니다. 따라서 정치인들과 종교 지도자들은 이를 소중히 여겨, 중동만의 인간적 역사적인 현실을 온전히 반영하지 못하는 단조로운 중동으로 만들어버리고 마는 그러한 편파적 전략이나 정책을 피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32. 동방 가톨릭 자치 교회들의 목자들은 전통적인 총대교구 지역에서 신자 수가 감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안타까움과 염려하는 마음으로 깨닫고 있습니다. 따라서 얼마 전부터 이주 사목을 계발해 왔습니다.25) 신자들이 가진 것을 다 팔아 고향을 떠나는 일 없이 계속 희망을 가지도록 동방 가톨릭 교회의 목자들이 온 힘을 다 기울이고 있음을 저는 확신합니다.26) 저는 목자들이 디아스포라 지역의 자기 신부들과 신자들을 애정으로 계속 보듬어 주기를 격려합니다. 목자들은 그들이 그들 가족과 교회와 계속 긴밀히 연락하고 또 무엇보다도 유서 깊은 영적 전통을 바탕으로 이룩된 그들의 종교적 정체성에 힘입어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충실히 지키도록 권유하여야 합니다.27) 하느님과 저마다 속한 교회에 대하여 이러한 친밀감을 유지함으로써, 그리고 라틴 교회 형제자매를 향한 깊은 사랑을 키움으로써, 그들은 가톨릭 교회 전체를 위하여 큰 보탬이 될 것입니다. 저는 동방 가톨릭 신자들이 정착하는 곳의 교회 목자들에게도 권고합니다. 사랑과 형제적 존중으로 그들을 환영하고, 이민들과 그들의 출신지 교회가 맺는 친교의 유대를 북돋우며, 그들이 고유 전통에 따라 전례를 거행하고, 가능하다면 사목 활동과 본당 활동을 펼칠 수 있게 배려해 주시기를 바랍니다.28)

33. 중동의 라틴 교회는 신자수의 급격한 감소를 겪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상황에서 활동하면서 다양하고 새로운 사목적 도전들에 대처하여야 합니다. 경제적으로 탄탄한 나라의 목자들은 아프리카, 극동, 인도 아대륙 출신 노동자들의 대대적 유입에 응답하여야 합니다. 대부분 미혼 남녀나 온 가족으로 이루어지는 이러한 이주 노동자 단체들은 이중의 불안을 접하게 됩니다. 그들은 자기가 일하는 나라에서 이방인이고, 흔히 차별과 불의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방인에게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들도 마땅히 존중받아야 합니다. 그들에 대한 우리의 환대는 최후의 심판 때에 헤아려질 것입니다(마태 25,35.43 참조). 29)

34. 이들 이주 노동자들은 다소 제약이 있는 계약이나 심지어 합법적인 계약에 얽매여 다른 이들에게 휘둘려도 스스로를 방어할 힘이 없어 착취당하고 있고 흔히 그 지역의 법률과 국제 조약을 위반하는 사례의 피해자가 됩니다. 그들은 또한 강한 압력과 심한 종교 규제에 시달립니다. 그들을 돌보는 목자들의 임무는 꼭 필요하면서도 어렵습니다. 저는 어떠한 교회에 속하든 모든 가톨릭 신자와 모든 사제가 지역 주교와 진정한 친교를 이루고 사목적 협력을 이루도록 격려합니다. 또한 주교들도 아버지의 마음으로 모든 동방 신자들을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 주도록 당부합니다. 함께 협력하고 무엇보다도 한 목소리를 낼 때, 이와 같은 상황에 있는 모든 이가 자신의 신앙을 실천하고 거행하며 다양한 영적 전통으로 풍요로워지고 출신지 교회 공동체와 계속 연락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또한 이러한 새로운 인구를 받아들인 나라의 지도자들이 그들의 권리를 존중하고 수호하며, 종교 자유를 촉진하고 예배 장소의 건축을 장려함으로써 그들의 자유로운 신앙 표명을 허용할 것을 당부합니다. 종교 자유는 “그리스도인과 무슬림의 대화 주제가 될 수 있습니다. 시노드 교부들은 이 대화가 시급하고 유용하다는 것을 거듭 강조하였습니다.”30)

35. 중동에서 태어난 일부 가톨릭 신자들은 필요해서 또는 지치거나 절망해서 자기 조상들이 살던 땅과 자기 가족과 신앙 공동체를 떠나겠다는 극단적인 결심을 합니다. 반면, 또 어떤 신자들은 희망을 가지고 자기 나라와 공동체에 머물기로 선택합니다. 저는 이러한 신자들이 그 훌륭한 투신을 거듭 다짐하며 굳은 신앙을 가지도록 격려합니다. 또 어떤 가톨릭 신자들은 중동으로 이민 온 자기 형제자매의 경우처럼 안타까운 과정을 선택합니다. 불확실한 현실에서 벗어나 더 나은 미래를 꿈꾸며, 생계와 일을 위하여 중동의 다른 나라로 가겠다는 선택을 하는 것입니다. 중동에서 태어난 가톨릭 신자들과 중동으로 이주해 온 가톨릭 신자들은 모두 함께 어우러져 이 지역 가톨릭의 현재 모습을 이루고 있습니다.

36. 보편 교회의 목자로서 저는, 최근 수 십 년 사이 중동에서 태어난 신자들과 이 지역으로 이주해 온 신자들의 인구 비율이 엇비슷해지고 있음을 인식하며, 중동의 모든 가톨릭 신자 여러분에게 한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하느님께는 오로지 한 백성만이 있고, 신자들에게는 오로지 한 믿음만이 있을 뿐입니다! 서로 일치하고 상호 사랑과 존중으로 형제적 친교를 이루며 살아가고자 노력하십시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여러분의 신앙을 신빙성 있게 증언하십시오. 하느님께서 여러분의 기도를 들어 주실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 삶의 방식에 복을 내려 주시고 당신 성령을 보내 주시어 여러분이 날마다 그날의 짐을 짊어질 수 있게 해 주실 것입니다. “주님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기”(2코린 3,17) 때문입니다. 저는 베드로 성인께서 이와 비슷한 상황을 경험하고 있던 그리스도인들에게 써 보내신 권고 말씀을 바로 여러분께 전합니다. “여러분이 열심히 선을 행하는데 누가 여러분을 해치겠습니까? …… 사람들이 여러분을 두렵게 하여도 두려워하지 말고 무서워하지 마십시오. 다만 여러분의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거룩히 모시십시오. 여러분이 지닌 희망에 관하여 누가 물어도 대답할 수 있도록 언제나 준비해 두십시오”(1베드 3,13-15).

제2부
“신자들의 공동체는 한마음 한뜻이 되었다”
(사도 4,32)

37. 초기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외적 측면이 “한마음 한뜻”이라는 교회의 친교(koinonia)를 나타내는 영적 특성으로 묘사됩니다. 이 구절은 개인과 공동체의 내적 생활을 반영하는 것으로, 증언의 심오한 뜻을 전해 줍니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내적으로 결속되는 각 개별 교회는 초기 신자 공동체의 아름다움을 새롭게 경험할 수 있습니다. 초기 신자 공동체는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드러내는 특성인 사랑으로(요한 13,35 참조) 움직이는 신앙 안에서 일치를 이루었습니다. 친교는 지속적이고 일관된 증언을 가능하게 하고 끊임없는 회개를 필요로 합니다. 회개는 온전한 친교를 이끌고 증언을 공고히 합니다. “친교 없는 증언은 있을 수 없습니다. 친교 생활은 참으로 위대한 증언입니다” 31) 친교는 모든 이가 온전히 받아들여야 하는 은총이며 지속적으로 새롭게 이룩해야 하는 실재입니다. 중동에 있는 모든 교회의 구성원들이 자신의 소명에 따라 기도하면서 겸손한 마음으로 친교를 강화하여 그리스도께서 기도하셨던 그 일치가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요한 17,21 참조).

38. 교회의 ‘가톨릭’ 개념은 보편과 개별 사이에 존재하는 친교를 지향합니다. 보편 교회와 개별 교회 사이에는 ‘상호 내면성’의 관계가 있습니다. 이는 교회의 보편성을 나타내고 구체화합니다. 각 부분 안에 있는 전체는 각 부분에 보편성을 향한 내적 동력을 줍니다. 이 동력이 한편으로는 각 개별 교회의 선교 동력으로 드러나고, 다른 한편으로는 서로 조화로운 협력을 이룬 활동도 포함된 다른 부분들의 좋은 점을 진지하게 인식하는 데에서도 드러납니다. 보편 교회는 개별 교회보다 앞서는 실재입니다. 개별 교회는 보편 교회 안에서 보편 교회를 통하여 태어납니다. 32) 이러한 사실은 가톨릭 가르침, 특히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에 충실히 반영되어 있습니다. 33) 이는 교회 친교의 ‘교계적’ 차원을 이해하게 해 주고 개별 교회가 그 일치 안에서 풍부하고 합당한 다양성을 지속적으로 발전시키도록 해 줍니다. 그 일치 안에서 개별 은사는 교회의 보편성을 풍요롭게 하는 참다운 원천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교회론의 기본 원칙에 대한 새롭고 경험으로 다져진 의식은 동방의 여러 나라에서 가톨릭 정체성의 특별함과 부요함을 재발견하도록 해 줄 것입니다.

총대주교들

39. 자치 교회의 아버지이며 수장인 총대주교들은 친교의 가시적 준거이며 깨어 있는 수호자들입니다. 그 본성과 사명에서 총대주교들은 하느님의 양떼를 돌볼 임무를 지니고(1베드 5,1-4 참조) 친교를 이루는 사람들이며, 교회 일치의 봉사자들입니다. 총대주교들이 수행하는 직무는 모든 차원에서, 곧 총대주교들 사이에서, 그리고 총대주교와 그의 관할에 있는 주교와 사제와 수도자와 평신도들 사이에서 실질적으로 실천되는 사랑을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40. 총대주교들과 로마 주교의 온전한 일치는 총대주교의 교회법적 선출 직후 그들이 교황에게 요청하는 교회적 친교(ecclesiastica communio)에 뿌리를 내린 것입니다. 총대주교는 이러한 특별한 유대로 교회의 보편성과 일치를 보여 줍니다. 34) 총대주교의 사목은 자기 관할 지역 안에 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제자들을 대상으로 합니다. 그들은 증언을 위한 친교의 표징으로서 중동 가톨릭 총대주교 회의와 총대주교들의 여러 회의에서 일치와 연대를 강화하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일치된 단체 행동을 하기에 앞서 교회에 매우 중요한 문제에 관하여 서로 논의해야 할 필요성을 인식해야 합니다. 총대주교는 자신의 증언이 신뢰를 얻도록, 의로움과 신심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추구해야 합니다(1티모 6,11 참조). 그리고 몸소 가난하게 되시어 우리가 그 가난으로 부유하게 해 주신(2코린 8,9 참조) 예수님을 본받아 검소한 생활 방식을 따라야 합니다. 총대주교들은 또한 교회 관할 지역 사이에 철저한 인사 관리와 교회 자산 관리를 통하여 실질적 연대가 촉진되도록 세심하게 보살펴야 합니다. 이는 그들의 임무에 속하는 일입니다. 35) 온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당신의 사명을 다하신 예수님을 본받아(마태 9,35 참조), 총대주교는 자기 관할 지역의 사목 방문을 열심히 수행하여야 합니다. 36) 총대주교는 감독하는 자신의 권리와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주교, 사제, 평신도, 특히 가난한 이들, 병든 이들, 추방된 이들, 영적으로 고통 받는 이들을 위한 그의 형제적이고 아버지다운 사랑을 구체적으로 증언하기 위하여 사목 방문을 해야 합니다.

주교들

41. 주교 수품으로 주교는 주교단의 일원이 되는 동시에, 가르치고 선포하고 다스리는 임무를 통하여 지역 공동체의 목자가 됩니다. 총대주교들과 함께 주교들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몸인 교회(에페 4,12-15 참조)에 맞갖은 다양성 안의 일치를 드러내는 가시적인 표징이 됩니다. 주교들은 자유롭게 선발되고 파견되어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부활하신 주님께서 명령하신 모든 것을 지키도록 그들을 가르쳐야 하는 첫 번째 사람들입니다(마태 28,19-20 참조).37) 그러므로 주교들이 스스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에 간직하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주교들은 유감스럽게도 중동에 만연된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신앙의 완전성과 단일성을 굳건히 수호하며 용기 있게 말씀을 선포하여야 합니다.

42. 친교와 봉사(diakonia)의 생활을 촉진하려면, 주교 자신이 스스로의 쇄신을 위하여 꾸준히 노력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러한 내적 성찰을 위하여 “무엇보다도 기도 생활, 헌신, 희생, 다른 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필요합니다. “또한 사도이며 목자로서 소박과 청빈과 겸손에 바탕을 둔 모범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끝으로 진리와 정의와 건전한 도덕과 약자의 보호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38) 그토록 간절히 바라는 공동체의 쇄신을 위하여 주교들이 모든 세례 받은 이들, 그리고 특히 그들의 가장 가까운 협력자인 사제들에게 아버지이며 목자로서 관심을 보여 줄 필요가 있습니다. 39)

43. 각 지역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친교는 교회 간 친교의 주된 기초가 됩니다. 이 친교는 하느님 말씀과 성사들과 여러 형태의 기도를 통하여 지속적으로 길러집니다. 저는 주교들이 자기 관할 지역에 있는 신자들의 사회적 상황, 국적, 출신 교회에 관계없이 그들에게 관심을 보여 주기를 바랍니다. 주교들은 자기에게 맡겨진 양 떼를 돌보고 보살펴야 합니다. “여러분에게 맡겨진 이들을 위에서 지배하려고 하지 말고, 양 떼의 모범이 되십시오”(1베드 5,3). 주교들은 신앙을 규칙적으로 실천하지 않는 이들과 여러 가지 이유로 더 이상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이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40) 주교들은 또한 그리스도 신앙을 고백하지 않는 이들 가운데 그리스도 사랑의 현존을 보여 주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여 주교들은 그리스도인들의 일치와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된 인간들(창세 1,27 참조)의 연대를 촉진하게 될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느님 아버지에게서 나오고 우리는 그분을 향하여 나아가기 때문입니다(1코린 8,6 참조).

44. 주교들은 동방 교회법이나 라틴 교회법에 따라 교회의 현세 재화를 현명하고 정직하고 투명하게 관리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시노드 교부들은 개인 재산과 교회 재산 사이에 발생할 수 있는 모든 혼란을 예방하고자 엄격한 재무 감사를 요청하였습니다. 41)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종을 하느님 신비의 관리인이라고 말하였습니다. “무릇 관리인에게 요구되는 바는 그가 성실한 사람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1코린 4,2). 관리인은 자기 것이 아닌 재산을 관리합니다. 사도의 말에 따르면 이 재산은 더 높은 것, 곧 하느님 신비를 위하여 사용되도록 정해진 것입니다(마태 19,28-30; 1베드 4,10 참조). 이러한 성실하고 공정한 관리는 많은 동방 교회의 참다운 기둥인 수도회 설립자들이 요청한 것으로 무엇보다도 복음화와 자선을 위해 활용되어야 합니다. 주교는 자기의 첫째 협조자들인 사제들이 합당한 보수를 받도록 하여 사제들이 세속적인 관심에 휩쓸리지 않고 의연하게 하느님의 일과 그들의 사목적 사명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가난한 이들을 돕는 이는 하늘을 얻게 됩니다! 야고보 성인은 가난한 이들이 마땅히 받아야 하는 존중과 그들의 중요성과 공동체 안에서 그들의 참된 자리를 강조하였습니다(야고 1,9-11; 2,1-9 참조). 그러므로 교회 재산의 관리는 해방시키시는 예수님의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선포하는 방법이 됩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 4,18-19). 충실한 관리인은 주님만이 값진 진주이심을 알고 있습니다(마태 13,45-46 참조). 주님만이 우리의 참된 보화이십니다(마태 6,19-21; 13,44 참조). 모든 주교가 사제와 신학생과 신자들에게 이를 분명히 보여 주는 모범이 되기 바랍니다! 더 나아가 교회 재산의 양도는 관련 교회법 규범과 현행 교황 법령들에 따라 엄격하게 이루어져야 합니다.

사제, 부제, 신학생들

45. 사제는 수품으로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이 되어 총대주교와 주교의 친밀한 협조자가 되고 그들의 삼중 직무(munus)에 참여합니다. 42) 이 사실 자체만으로도 사제는 친교의 봉사자가 됩니다. 사제는 이 역할을 수행하며 그리스도와 긴밀한 일치를 이루고 모든 이를 위한 사랑과 자선 활동에 열정을 보여야 합니다. 그리하여 사제는 모든 세례 받은 이들이 부름 받은 성화의 빛을 비출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사제는 하느님 백성을 가르치고 용기를 북돋워 주어 그들이 복음적 사랑과 일치의 문명을 건설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이를 위하여 사제는 하느님의 말씀과 교회의 전통과 가르침을 전달하고, 성사 거행을 통하여 자기 양 떼가 신앙생활을 새롭게 다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43) 동방의 전통은 영성 지도에 대한 탁월한 통찰력을 보여 왔습니다. 사제와 부제와 봉헌된 이들은 이를 실천하여 신자들에게 영원에 이르는 길을 열어 주기 바랍니다.

46. 또한 친교의 증언에는 탄탄한 신학 교육과 영성 교육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 교육은 지속적인 지적 영적 쇄신을 필요로 합니다. 주교들은 사제와 부제들에게 그들의 신앙생활을 깊이 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하여 그들이 신자들에게 “먹을 것을 제때에”(시편 145[144],15) 주며 은혜를 베풀도록 해야 합니다. 신자들 또한 사제와 부제가 부끄럽지 않은 행동의 모범을 보여 줄 것을 당연히 기대하고 있습니다(필리 2,14-16 참조).

47. 사랑하는 사제 여러분, 저는 여러분이 날마다 성품의 존재론적 의미를 재발견하기 바랍니다. 성품은 여러분이 세례 받은 이들의 성화와 모든 사람의 진보를 위한 원천으로 사제직을 살아가도록 촉진합니다. “여러분 가운데에 있는 하느님의 양 떼를 잘 치십시오. …… 부정한 이익을 탐내서 하지 말고 열성으로 하십시오”(1베드 5,2). 어떠한 어려움이 따른다 하여도 가능하다면 사목 팀을 이루어 함께하는 생활과 활동을 소중하게 여기십시오(1베드 4,8-10 참조). 이는 여러분이 지역과 보편 교회 차원에서 사제적 사목적 친교를 더욱 온전하게 존중하고 경험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부제 여러분, 여러분의 주교와 사제와 일치하여 여러분에게 맡겨진 고유한 책무에 따라 여러분의 직무를 수행하면서 하느님 백성을 섬기십시오.

48. 사제 독신은 하느님께서 당신 교회에 주신 소중한 은사입니다. 동방과 서방 모두 이를 감사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사제 독신은 언제나 시의적절한 예언적 표징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동방의 오랜 전통에 속하는 혼인한 사제들의 직무에 관해서도 언급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가족과 더불어 자신의 직무를 충실하게 수행하며 때로는 어려운 생활 여건에서도 성화로 부름 받은 이러한 사제들을 격려하고 싶습니다. 모든 이에게 저는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여러분의 탁월한 사제 생활44)은 여러분이 일구어야 하는 새로운 성소들을 틀림없이 불러일으킬 것입니다.

49. 하느님께서 어린 사무엘을 부르신 일은(1사무 3,1-19 참조) 하느님의 뜻을 식별하고 그 부르심에 기꺼이 응답하도록 도와줄 현명한 안내자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그러므로 성소의 꽃을 피우려면 구체적인 사목 계획이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성소가 꽃 피울 수 있도록 가정과 본당과 교회 운동 단체와 교육 기관들이 기도로 뒷받침해 주어야 합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이들은 특정한 양성 센터에서 성장하고, 적합하고 모범적인 양성자의 지도를 받아야 합니다. 양성자들은 그들을 기도와 친교와 증언과 선교 의식으로 훈련시킬 것입니다. 인간 생활의 영적, 지적, 사목적 측면을 다루는 적절한 프로그램이 있어야 하며, 이 프로그램은 다양한 사회적 상황, 출신, 문화적 교회적 배경을 신중히 고려하여야 합니다.45)

50. 사랑하는 신학생 여러분, 물이 없는 곳에서 갈대는 자랄 수 없습니다(욥 8,11 참조). 이와 마찬가지로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깊이 내리지 않고, 그분 말씀을 향하여 꾸준히 돌아서지 않고, 그분의 교회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심 없이 사랑하지 않는다면, 친교의 참다운 일꾼과 신앙의 참다운 증인이 될 수 없습니다. 오늘도 여러분은 용감하고 흠 없는 증언을 위하여 친교를 맺으며 살아가도록 부름 받고 있습니다. 하느님 백성의 신앙을 강화하는 것은 여러분이 어떻게 증언하느냐에 달려 있을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여러분의 미래 사명을 염두에 두고 다른 언어와 문화들을 알아 여러분 교회의 문화적 다양성에 더욱 열려 있기를 바랍니다. 마찬가지로 교회 안의 다양성과 모든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다양성, 그리고 종교간 대화에도 열려 있기를 바랍니다. 신학생들에게 보내는 저의 서한을 잘 읽어 보면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46)


봉헌 생활

51. 다양한 형태의 수도 생활이 중동에서 생겨나 이 지역 여러 교회들의 설립 기반이 되었습니다. 47) 수도자들은 기도에 자신의 삶을 바쳐 왔습니다. 그들은 밤낮으로 모든 시간을 성화하며 교회와 온 인류의 걱정과 필요를 자신의 기도에 담습니다. 그들이 교회와 모든 신자의 삶에서 기도가 얼마나 중요한지 지속적으로 일깨워 주기를 바랍니다. 또한 수도원이 신자들이 기도를 배우도록 지도받을 수 있는 곳이 되기 바랍니다!

52. 관상 생활이든 사도직 생활이든, 봉헌 생활은 세례성사 때 받은 축성을 더욱 깊이 하는 것입니다. 수도자들은 순명, 정결, 청빈이라는 복음적 권고의 서원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더욱 철저히 따르고자 합니다. 48) 수도자들이 하느님께 자신을 아낌없이 바치고 모든 사람을 사심 없이 사랑하는 것은 하느님에 대한 증언이며 세상에 대한 하느님 사랑의 참다운 표징입니다. 성령의 고귀한 선물로 살아가는 봉헌 생활은 교회 생활과 사목 활동에 없어서는 안 될 버팀목입니다. 49) 하느님 말씀, 형제적 친교, 봉사의 증언에 실질적인 바탕을 둔(사도 2,42 참조) 수도 공동체는 그들이 속한 교회 안과 온 세상에서 친교의 예언자적 표징이 될 것입니다. 공동 수도 생활에서 각 공동체나 수도원은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고 자신의 이웃과 친교를 나누는 특별한 자리가 되어야 합니다. 바로 이곳에서 봉헌된 이들은, 기도와 묵상으로 그들의 사명에 충실하기 위하여, 그리고 모든 신자들에게 이미 지금 여기에서 시작된 영원한 생명의 표징이 되기 위하여(1베드 4,7 참조) 날마다 그리스도에게서 새롭게 출발하는 법을 배웁니다. 50)

53. 저는 중동에서 수도 생활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따르도록 부름 받은 여러분 모두에게 권고합니다. 예레미야 예언자처럼 하느님의 말씀에 사로잡히십시오. 그리고 그 말씀을 타오르는 불길처럼 여러분의 마음 안에 간직하십시오(예레 20,7-9 참조). 하느님의 말씀은 여러분의 봉헌의 존재 이유이고 기초이며, 그 궁극적 객관적인 기준입니다. 하느님 말씀은 진리입니다. 이 말씀을 따를 때 여러분은 여러분의 영혼을 정화하여 형제자매로서 진실로 서로 사랑하게 됩니다(1베드 1,22 참조). 여러분 수도회의 법적 지위가 어떠하든지 간에, 사목 활동과 선교 활동에서 일치의 정신으로 주교에게 언제나 협력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보여 주십시오. 수도 생활은 몸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자신을 온전히 내맡기는 인격적 헌신으로(콜로 1,18; 에페 4,15 참조), 그리스도와 당신 교회의 끊을 수 없는 유대를 반영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 성소와 관련하여 가정에 도움을 주고, 본당이 다양한 사제 성소와 수도 성소에 열려 있도록 독려하여야 합니다. 이는 지역 교회 안에서 증언을 위한 친교 생활을 공고히 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51) 현대인들의 요구에 끊임없이 응답하며, 그들에게 바른 길과 인간 삶의 심오한 의미를 가르쳐 주기 바랍니다.

54. 저는 봉헌된 이들만이 아니라 동방 가톨릭 교회의 모든 구성원에 대하여 조금 더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이는 수도 생활의 고유한 특징인 복음적 권고와 관련됩니다. 수도 생활은 수많은 자치 교회들이 생겨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고 오늘날 자치 교회의 생활에서도 여전히 그러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순명, 정결, 청빈의 복음적 권고를 오래도록 깊이 있게 성찰하여 그 아름다움과 그것이 지닌 증언의 힘과 사목적 측면을 재발견하여야 할 것 같습니다. 저마다 자신의 성소에 따라 확고한 결심으로 흔들림 없이 하느님을 찾고자(quaerere Deum) 돌아설 때, 비로소 신자와 신앙 공동체와 온 교회는 내적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찾음으로써 우리는 하느님과 이웃과 나 자신과의 관계를 올바로 정의하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는 자치 교회는 물론이고 라틴 교회에도 해당됩니다.

평신도

55. 평신도들은 세례성사를 통하여 온전히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되고 보편 교회의 사명에 참여합니다. 52) 평신도들이 교회의 삶과 내적 활동에 참여하는 것은 그들이 교회 구조의 한계를 넘어서게 해 주는 영원한 영적 원천입니다. 평신도들은 세상 속의 사도로서, 복음과 교회의 가르침과 사회 교리를 구체적인 활동으로 옮깁니다. 53) 실제로, “그리스도인들은 어엿한 시민으로서 참행복의 정신으로 자신의 책임을 다하여, 사회 전체에 도움이 되는 평화의 일꾼과 화해의 사도가 될 수 있고 또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54)

56. 사랑하는 평신도 여러분, 현세의 일이 여러분의 고유한 분야이기에 55) 저는 여러분이 모든 선의의 사람들과 형제의 유대와 협력을 강화하여, 공동선 추구, 공적 자금의 건전한 운용, 종교 자유, 모든 인간의 존엄성 존중을 위하여 노력할 것을 독려합니다. 복음을 명시적으로 선포하는 일이 방해받거나 불가능한 상황에서 교회의 사명이 장애를 만나게 되는 경우에도, “이교인들 가운데에 살면서 바르게 처신하십시오. 그래야 …… 그들도 여러분의 착한 행실을 지켜보고, 하느님께서 찾아오시는 날에 그분을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1베드 2,12). 한결같은 마음으로 일상 생활과 활동을 성실히 하여 56) 여러분의 신앙에 관하여 누가 물어도 대답할 수 있도록 언제나 준비해 두십시오(1베드 3,15 참조). 여러분의 증언이 참된 열매를 맺도록(마태 7,16.20 참조), 온갖 분열과 그리스도인 생활에 관한 모든 주관적인 해석을 극복할 것을 촉구합니다. 그리스도인 생활의 가치와 요구들을 여러분의 가정, 사회, 직장, 정치, 문화 생활과 따로 떼어놓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평신도 생활 속의 모든 다양한 분야는 하느님 계획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57)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담대해지기를 바랍니다. 또한 그 어떠한 시련과 환난과 박해도 여러분을 그리스도에게서 떼어놓을 수 없다는 것을 확신하기를 바랍니다(로마 8,35 참조).

57. 중동에서 평신도들은 여러 동방 교회나 라틴 교회의 가톨릭 신자들과 꾸준히 형제적 관계를 맺어 왔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필요한 경우 서로의 예배 장소를 자주 방문하여 왔습니다. 참다운 친교의 경험을 보여 주는 이러한 인상적인 현실에 한 가지 더 추가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곧 같은 지역 안에 은혜롭게도 여러 교회의 관할 지역들이 중첩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중동의 교회는 이 특별한 면모로 전 세계의 다른 지역 교회들에 모범이 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중동은 어떤 의미에서 교회의 미래가 이미 실현되고 있는 현장입니다. 교회 일치 분야에서 지역적으로 얻은 경험이 그러하듯, 이러한 모범은 지속적으로 향상되고 정화될 필요가 있습니다.

가정

58. 창조주께서 바라신 대로 혼인을 바탕으로 하느님께서 세우신 가정(창세 2,18-24; 마태 19,5 참조)은 오늘날 여러 위험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특히 그리스도인 가정은 그 어느 때보다 그 깊은 정체성 문제에 당면해 있습니다. 우리 시대에 일부 신자들은 성사혼의 본질인 일치와 불가해소성(마태 19,6 참조),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가정과 성과 사랑의 방식에 대하여 이의 제기까지는 아니지만 제대로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온 세상에 널리 확산된 일부 현대 문화의 영향으로, 복음을 거스르는 방식을 따르려는 유혹이 있습니다. 부부의 사랑은,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과 맺으시고 십자가 위의 희생으로 완성된 결정적 계약의 일부입니다. 순교에 이르기까지 상대방에게 헌신하는 상호 증여라는 이 사랑의 특징은 일부 동방 교회에서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동방 교회에서 신랑과 신부는 혼례식에서 배우자를 “왕관”으로 받아들이는데, 이에 걸맞게 혼례식을 “대관 전례”라고 부릅니다. 부부의 사랑은 잠깐 동안 치르는 행사가 아니라 평생 동안 인내심을 가지고 풀어 가야 하는 과제입니다. 그리스도를 닮은 사랑을 날마다 실천하도록 부름 받은 그리스도인 가정은 세상 속에서 교회의 현존과 사명을 보여 주는 탁월한 도구입니다. 그렇기에 가정에 문제와 어려움이 발생하면 사목적 도움 58)과 지원을 받아야 합니다. 특히 사회적, 가정적, 종교적 구심점이 약해지거나 사라진 곳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59)

59. 저는 중동의 모든 그리스도인 가정이 하느님 말씀과 성사들에 힘입어 지속적으로 거듭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좀 더 온전한 가정 교회가 되어 신앙과 기도를 가르치는 장소가 되고, 아울러 성소의 못자리, 덕행과 윤리적 가치를 자연스럽게 배우는 학교가 되며 사회의 살아있는 기초 세포가 되기를 바랍니다. 나자렛의 성가정을 늘 바라보아야 합니다.60) 성가정은 생명을 받아들이고 당시의 율법과 종교적 관습을 지켜 신심을 보여 주는 기쁨을 누렸습니다(루카 2,22-24.41 참조). 어린 예수님을 잃은 시련, 박해와 이주의 고통, 일상의 고된 노동을 경험했던 이 성가정을 보십시오(마태 2,13 이하; 루카 2,41 이하 참조). 여러분의 자녀들이 하느님과 사람들의 세심한 눈길 아래 지혜와 키와 은총이 자라도록 도와주십시오(루카 2,52 참조). 여러분의 자녀들이 성부를 믿고 그리스도를 본받고 성령을 따르도록 가르치십시오.

60. 이렇게 간략하게나마 혼인을 통한 남자와 여자의 공통된 존엄과 소명을 살펴본 뒤, 중동의 여성들에 대하여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생각을 해 보고자 합니다. 창조에 관한 첫 번째 이야기는 남자와 여자 사이의 본질적인 평등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창세 1,27-29 참조). 이러한 평등은 죄의 결과로 손상되었습니다(창세 3,16; 마태 19,4 참조). 원죄의 결과인 이 유산을 극복하는 것이 남자든 여자든 모든 인간의 의무입니다. 61) 여성들이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당하는 여러 형태의 차별에 맞서, 가톨릭 교회가 하느님 계획에 충실하여 여성의 개인적 존엄과 남성과의 평등을 증진하고자 노력할 것임을 모든 여성에게 약속드리고 싶습니다. 62) 그러한 차별의 관행은 친교와 증언의 삶에 심각한 손상을 입힙니다. 이는 여성들뿐 아니라 그 누구보다도 창조주 하느님에게 심각한 해가 됩니다. 인간 생명을 사랑하고 보호하려는 여성들의 내적 성향을 인식하고, 교육, 보건, 자선 사업, 사도직 활동에서 여성들이 쏟는 특별한 기여에 감사하며, 저는 여성들이 공적 생활과 교회 생활에서 더욱 큰 역할을 하고, 또 그렇게 하도록 허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63) 이렇게 하여 여성들은 한층 우애가 넘치는 사회와 세례 받은 이들의 참다운 친교로 더욱 아름다워지는 교회를 만들어가는 데에 기여할 수 있을 것입니다.

61. 특히 혼인 문제와 관련하여 남녀가 법정에서 다투는 불행한 경우, 여성의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이고, 남성과 마찬가지로 여성도 존중하여 불의가 어느 정도 종식되도록 하여야 합니다. 여기에서 교회법을 좀 더 건전하고 공정하게 적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의 정의는 그것이 미치는 모든 차원과 모든 분야에서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혼인 문제에 관한 소송이 배교에 이르지 않도록 하는 일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 지역의 그리스도인들에게 혼인과 그 밖의 다른 분야에서 그들의 고유한 법이 제한 없이 적용될 기회도 보장되어야 합니다.

젊은이와 어린이

62. 저는 염려하는 아버지의 마음으로 중동 교회의 모든 어린이와 젊은이에게 인사합니다. 저는 긴 안목으로 인간적이고 그리스도교적인 삶의 지침을 찾는 젊은이들을 생각해 봅니다. 또한 젊은 때에 점점 교회와 멀어져 신앙 실천을 하지 않는 모든 이를 생각해 봅니다.

63. 사랑하는 젊은이 여러분, 저는 여러분이 기도의 힘으로 예수님과 참된 우정을 지속적으로 나누기 바랍니다(요한 15,13-15 참조). 더욱 견고해진 우정은 젊은 시절의 방황으로부터 여러분을 지켜 주는 등대가 될 것입니다(시편 25[24],7 참조). 개인 기도는 성사들을 자주 볼 때 힘을 얻게 됩니다. 성사는 교회 안에서 하느님과 형제자매를 진심으로 만날 기회를 마련해 줍니다. 예수님과의 우정을 가정 안에서 또 공개적으로 증언하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증언할 때에 다른 신앙인들인 유다인과 무슬림을 존중하기 바랍니다. 이들과 함께 여러분은 하늘과 땅의 창조주이신 하느님을 믿고, 높은 인간적 정신적 이상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 것을 두려워하거나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예수님과 맺은 관계는, 이웃 시민들의 종교가 무엇이든 기꺼이 그들과 협력하도록 도울 것입니다. 이를 통하여 여러분은 자유와 평등, 그리고 정의 안에서 이루는 평화의 원천과 기초인 인간 존엄을 바탕으로 여러분 나라의 미래를 건설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그분의 교회를 사랑하면, 여러분은 현대 문명에서 여러분을 완성시켜 주는 가치들과 여러분의 삶을 조금씩 망가뜨리는 악을 지혜롭게 식별하게 될 것입니다. 물질주의는 물론이고, 무분별한 사용으로 참다운 인간관계를 왜곡시킬 수 있는 일부 소셜 네트워크에 현혹되지 않도록 노력하십시오. 중동 교회는 여러분의 기도와 열정과 창의력과 능력, 그리고 그리스도와 교회와 사회, 특히 여러분 또래의 친구들에게 봉사하고자 하는 여러분의 깊은 헌신을 크게 기대하고 있습니다.64) 여러분의 신앙을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되는 모든 활동에 주저하지 말고 참여하십시오. 특별히 여러분을 향한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을 주저하시 마십시오. 사제직, 수도 생활 또는 선교 생활을 선택하여 망설이지 말고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따르십시오.

64. 사랑하는 어린이 여러분, 주님과 함께 하는 여러분의 여정에서 여러분의 부모가 특별한 공경을 받아야 한다는 점을 여러분에게 되새길 필요가 있겠습니까(탈출 20,12; 신명 5,16 참조)? 부모는 여러분 신앙의 교육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의 부모에게 여러분을 놀라운 선물로 주시어, 그들이 여러분의 건강을 보살피고, 여러분을 인간답고 그리스도인답게 교육시키며, 지성을 키울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부모와 교사들과 지도자들과 공공 기관들은, 임신(授精)의 순간부터 아이들의 권리를 존중할 의무가 있습니다.65) 사랑하는 어린이 여러분, 아기 예수님께서 하신 것처럼 부모에게 순종하여, 지금 여기에서 하느님을 섬기는 법을 배우십시오(루카 2,51 참조). 또한 여러분 가정과 학교와 그 밖의 다른 곳에서도 그리스도인답게 사는 법을 배우십시오. 주님께서는 여러분을 잊지 않으십니다(이사 49,15 참조). 주님께서는 언제나 여러분 곁에 계시며 여러분이 책임과 용기를 가지고 친절한 사람이 되어 주님과 함께 걷기를 바라십니다(토빗 6,2 참조). 모든 것에서 주 하느님을 찬미하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의 발걸음을 이끌어 주시고 여러분의 길과 계획이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해 주시기를 간청하십시오. 언제나 주님의 계명을 기억하고 그 계명들이 여러분의 마음에서 지워지지 않도록 하십시오(토빗 4,19 참조).

65. 저는 여러분에게 매우 중요한 문제인 어린이와 젊은이의 교육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습니다. 그리스도인 가정은 어린이와 젊은이들이 신앙을 키우는 자연스러운 자리, 곧 그들의 첫 교리 학교입니다. 이 어려운 시기에 어린이와 젊은이를 교육하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이 필수적인 과제는 이 지역의 특정한 사회적, 정치적, 종교적 상황 때문에 더욱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제가 부모님들에게 저의 지지와 기도를 약속드리고 싶은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소박하지만 확신에 넘쳐 신앙생활을 하는 일치된 가정에서 어린이들이 성장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린이와 젊은이가 부모의 기도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린이와 젊은이가 부모와 함께 교회에 가고 그들의 부모가 하느님을 사랑하고 더 잘 알고 싶어 한다는 것을 보고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부모가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자선을 베푸는 것을 보는 일이 어린이와 젊은이에게 특히 중요합니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이 좋고 아름답다는 것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어린이와 젊은이는 교회에 속한 것을 기뻐하고 이를 자랑스럽게 여길 것입니다. 그들이 하느님을 굳건한 반석으로 하여 그들의 삶을 만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개인적으로 체험할 것이기 때문입니다(마태 7,24-27; 루카 6,48 참조). 이 좋은 기회를 갖지 못한 어린이와 젊은이가 그들의 인생 여정에서 그리스도를 만나고 따르는 기쁨을 발견하도록 도와줄 참된 증인들을 만나게 되기를 바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