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번호 : 1293
  • 글쓴이 : 관리자
  • 작성일 : 2019-10-02 11:47:49
  • 조회수 : 176

천주교와 한글은 서로의 확산 촉매였다

“천주교와 한글은 서로의 확산 촉매였다”

- 주교회의 기관지 ‘경향잡지’, 10월호 특집으로 한글과 천주교의 관계 조명 -

 

3.1 운동 100주년인 2019년의 10월 9일 한글날을 앞두고, 한국천주교주교회의 기관지인 월간 ‘경향잡지’가 10월호 특집 ‘한국 천주교회와 한글’을 통해 조선왕조 후기에 한글과 한국 천주교회가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민중에게 같이 전파된 역사를 소개했다. 배우기 쉬운 한글이 천주교를 확산시켰고, 한국 천주교회는 선교를 위해 한글 전파에 앞장섰다는 것이 기고자들의 공통된 해석이다.

  

▲ 1850년대에 최양업 신부가 쓴 천주가사 ‘사향가’ 필사본(전주교구 김진소 신부 소장).


 1790년대 말에 복자 정약종이 한글로 쓴 교리서 ‘주교요지’ 필사본(서울 가회동성당 전시).

조원형 박사(서울대 기초교육원 강사)는 ‘초창기 한국 천주교회와 한글, 한국어’를 주제로 ‘천주가사’와 한글 교리서, 유럽인 선교사들의 한국어 연구 활동을 조명했다. 천주가사는 4·4조의 ‘가사’ 형식에 천주교 교리와 사상을 담은 일종의 교훈가사이다. 조선왕조 후기에 중인과 서민들이 가사 작품을 손수 창작, 기록하게 된 시대적 배경과 맞물려 활발히 창작되었으며, 꾸준한 필사와 보급을 통해 후대에 전수되었다.  

한국어 교리서는 실학자와 역관들에 의해 번역, 저술, 보급되었다. 복자 정약종 아우구스티노(1760-1801년)의 ‘주교요지’는 최초의 한국어 교리서이자 한글 교리서였다. 조선의 유럽인 선교사들은 동료와 후임들을 위해 한국어 교재를 집필하고 한국어와 한글을 본국에 소개했다. 제6대 조선교구장이었던 파리외방전교회 출신 리델 주교(1830-1884년)가 쓴 문법서 ‘한어문전’(1881년)은 최초로 한국어 문법을 서구 문법 이론에 근거해 분석한 연구서였다.  

조 박사는 “천주교는 유사 이래 처음으로 ‘한글로 기록된 한국어 문헌을 통해 전파된 종교’”라면서, “천주교 신자들이 한국어로 교리서를 쓰고 천주가사를 지음으로써 비로소 고차원적인 사상과 사유를 한문 없이 한국어로 논하고 공유하는 시대가 열렸다”고 평가했다. 

권영파 연구원(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순교영성연구소)은 ‘한글로 피워 낸 그리스도교 신앙’을 주제로 한글이 조선 민중의 그리스도 신앙 체험, 계층과 출신을 불문한 신자들의 일치, 신학 토착화를 촉진했다고 평가했다. 

1784년 한국 교회가 시작된 뒤 1780년대부터 천주교의 교세를 고발할 목적으로 작성된 상소문들을 보면, 당시에 이미 한글 기도서와 교리서들이 존재했으며 신자들이 한글로 된 책을 주변인들에게 전하며 선교했다는 기록이 발견된다. 1801년 신유박해에 관한 정부 기록을 정리한 ‘사학징의’에 따르면, 당시 조선에 유입된 한문 천주교 서적 120종 가운데 65퍼센트 이상이 번역되었다고 한다. 조선대목구 최초의 사목교서 ‘장주교윤시제우서’(1851년)는 신자들의 한글 교육을 “간절히 권”했으며, 1866년 병인박해 당시 흥선대원군은 천주교 신자들이 능하게 하는 세 가지 일 가운데 첫째로 한글 사용을 꼽기도 했다.  

평신도 지식인들의 역할도 컸다. 교우촌 신자들은 박해로 망실된 서적들을 한글로 새로 번역, 필사하며 교리서와 기도문을 공급했다. 선교사 달레 신부에 따르면 “조선말로 된 장례식 기도문과 예절을 공포한 뒤로 많은 신자가 외교인(=비신자)을 상관하지 않고 그것을 공공연히 행하기 시작했다”(‘한국 천주교회사’ 상권, 348면). 이에 대해 권 연구원은 “한글로 ‘하나’ 된 평신도와 사제의 협력에서 ‘함께 가는 신앙’을 발견”할 수 있으며, “한글은 사목자들에게 평신도의 신앙 감각을 투명하게 전해 주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염철호 신부(부산가톨릭대학교 교수, 언어학 박사)는 ‘한글 보급과 교육, 연구에서 천주교의 역할’을 주제로, 한국 천주교회가 한글 맞춤법을 연구하고 적극적으로 수용한 역사를 소개했다. “한국 천주교회의 한국어 연구는 자연스레 맞춤법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는데, 이유는 “지역마다 여러 방언으로 말미암아… 선교 활동에 어려움이 컸기 때문”이었다. 

 

▲한글 맞춤법 해설이 연재된 ‘가톨릭 청년’ 1933년 7월호 37-38면 지면(국회전자도서관 DB). 

일제강점기에도 한글 교육과 맞춤법 준수는 변함없이 강조되었다. 1932년에 라틴어로 간행된 ‘한국 천주교 공용 지도서’(Directorium Commune Missionum Coreae)는 여성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는 것을 평신도 지도자인 회장의 임무로 명시했다. 1933년 6월에 5개 교구 주교회의의 결의로 창간된 월간지 ‘가톨릭 청년’은 창간호부터 한글 맞춤법 해설(朝鮮語講話)을 연재했다.  

1933년 10월 29일 한글 맞춤법 통일안이 공식 선포되기 보름 전, 교구장들은 원산에서 열린 주교회의를 통해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교회 출판의 원칙으로 삼기로 결정했다(‘일치된 힘으로’[Viribus Unitis] 3호 39면; ‘가톨릭 청년’ 제2권 제12호, 1934년, 12-13면). 선교사들을 위해 발행된 라틴어 계간지 ‘일치된 힘으로’는 맞춤법의 세부 개념들을 소개하는 한편, 외국 선교사들이 100년간에 걸쳐 한글 맞춤법에 관심을 기울이며 한국어 초기 문법책들과 사전을 저술함으로써 한국어 문법 체계의 정착에 이바지한 데에 자부심을 드러낸다. 

염 신부는 한국 천주교회의 한글 사랑이 잘 알려지지 않은 이유가 “연구자들도 부족했지만 주교회의 자료들이 라틴어로 작성되었기에 접근 자체가 용이하지 않았기 때문”이라 진단하며, “이제라도 일제강점기 한국 천주교회, 특히 선교사들이 우리 민족과 문화, 언어를 어떻게 이해했는지에 대해 새로운 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역설했다. 

 

※ 경향잡지 2019년 10월호 특집 ‘한국 천주교회와 한글’ 기고문 전문 읽기

1) 초창기 한국 천주교회와 한글, 한국어(조원형 박사)
2) 한글로 피워 낸 그리스도교 신앙(권영파 연구원)
3) 한글 보급과 교육, 연구에서 천주교의 역할(염철호 신부)